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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계열의 서정시인의 에덴시학자 논문작성자 이영지
2014-01-25 15:27:29
hananim

■ 이영지(Lee Yeong Ji) 시인(poet)
△경북 영주 출생
△서울문리사범대 국어과, 명지대 대학원 국문과(문학박사). 서울기독대학원(철학박사)
△서울기독대학원 학술원 강의, 명지대 사회교육원 문예창작과 주임교수 역임
△《시조문학》에서 시조, 《창조문학》에서 詩 등단
△《창조문학》편집부국장.《말씀과 문학》편집국장. 한국창조문학가협회 사무국장.
△한국시조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영예문학교회 담임목사(자비량교회운영)
△한국창조문학대상, 추강시조문학상 수상
△시집『하오의 벨소리』,『행복의 순위』,『행복 행 내 님 네』외 다수
△이론서『한국시조문학론』,『이상 시(李箱詩) 연구』,『시조창작 리듬 론』외 다수
조회: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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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1390631249-25.hwp

4. 모더니즘 계열 서정시인의 에덴 시학

 

시는 재 생산성이어어 상상력이 동원된다. 홍문표는 에덴의 시학 창 2:7-25 정의를 내리고 있다.

 

 

생명나무와 에덴의 시학

2:7-25

 

우리는 창세기 1장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태초부터 계셔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시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어데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족보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족보는 참판지나 원숭이나 아메바의 해괴망측한 혈통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다짐하면서, 모든 만물 중에서도 으뜸인 하나님의 혈통으로 만들어진 정말 천하보다 귀한 존재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인간이 살기에 가장 좋은 환경으로 하늘과 땅, 해와 달과 별과 바다와 강과 온갖 동물과 식물을 만드시고는 당신의 형상과 모양과 속성을 지닌 사람을 만들었으며 모두가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축복하시고는 사람으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라는 권한까지 위임하셨습니다. 이러한 창조 기사를 보면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목적은 인간을 최고의 주인공으로 하는 장엄한 창조 드라마라는 사실에 감격하게 됩니다. 도대체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이토록 인간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셨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창1;31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하나님의 천지 만물 창조와 마지막 인간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으심을 받은 만물과 인간의 존재 이유도 분명해집니다.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을 통해서 피조물인 인간이 알아야할 절대 의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우주만물의 창조와 특히 인간창조에 관한 놀라운 기적은 너무나 중요하고 소중한 것이기에 창세기의 기자 모세는 1장의 말씀만으로 끝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인간창조의 그 심오한 사건을 보충하여 기술하게 됩니다.

 

창세기 2장의 구성을 보면 먼저 1-3절에서는 천지만물창조의 종결선언과 제7일에는 하나님의 안식하심, 그리고 이 날의 복되고 거룩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1-2 읽어보겠습니다.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 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천지의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의 천지만물 창조 작업이 완료되었음을 선포하시는 말입니다. 참으로 엄숙하고 장엄한 선언입니다. 그리고는 창조 주체인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는 그가 하시던 일을 그치고 안식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창 2:1-3는 하나님의 창조 사업이 일단락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6일간 창조 하시고 일곱째 날은 쉬기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곱째 날 하나님은 안식하시면서도 이 날을 복되게 하셨고, 거룩하게 하셨다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6일간 일하고 일요일은 무조건 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이날을 복되고 거룩하게 보내야합니다. 그 이유가 바로 이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일날 복되고 거룩하게 보내는가 그렇지 않는 가에 따라 성도와 비성도가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되고 거룩하게의 진의는 무었일까. 특히 복되고란 말이 애매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말을 God blessed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피조물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말씀이지요. 최근 이 blessed를 두고 말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복주셨다” “하나님이 축복하셨다어느 쪽이 맞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경우에도 하나님 복주옵소서하나님 축복해 주옵소서냐 하는 하는 것입니다. 물론 문법적으로는 하나님이 복주셨다, 복주옵소서가 맞습니다. 왜냐하면 축복이란 누구에게 복을 빌다라는 뜻이니까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빌다는 말이 않됩니다. 하나님은 복을 직접 주시는 분이지 누구에게 비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은 관습적이고 사회적이고 의도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축복이란 말을 복주옵소서 또는 blessed의 의도로 사용했고, 듣는 이도 그렇게 이해했다면 허용할 수 있는 것이며 더구나 정죄의 대상이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거룩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를 성별이니 성화니 하여 그 개념이 더 까다롭습니다. 이는 영어로 Holy입니다. Holy의 참뜻은 with a divine power 신의 힘과 함께하는 삶, 일상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적인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되고 거룩한 삶은 기독교 성도들의 기본적인 삶이고 구원받은 성도들의 바른 삶의 경지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창 2:4-7에서 다시 인간창조에 대한 말씀을 보게 됩니다. 인간창조는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기도하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인가를 보다 근본적으로 밝혀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했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 했으니 행여 인간들이 하나님과 동격인 것으로 오해하고 배신할 수 있을 것임을 염려하셨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창 1:26-31에서 인간 창조는 정말 눈물겹도록 환상적이었습니다. 다른 생명들은 명령적인 말 한마디로 창조했지만, 사람만은 3위 일체가 협의하여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정말 리틀 하나님으로 창조 하셨고, 하나님의 완벽한 분신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만 본다면 인간은 바로 지상의 하나님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대단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구체적인 인간의 실체는 1장과 다릅니다. 창세기 2:7 함께 봉독하실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1장에서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했는데 여기서는 흙으로 만들었다 했습니다. 1장에서 형상과 모양이란 외형적인 윤각과 영적인 속성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닮았음을 지적한 것이라면 2장에서는 그 윤곽들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는 흙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 흙은 땅으로부터 또는 티끌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대목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속성으로 창조되었지만 동시에 땅으로 그 육신이 만들어 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속성을 지닌 영적인 존재이면서도 유한한 지상의 물질적인 존재라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잘 하면 인간은 하나님처럼 영원한 영적 존재가 될 수 있지만, 잘 못하면 유한한 땅의 존재가 될 수 있는 양면성의 아슬한 절벽에 서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족보라는 황홀한 환상을 했지만, 2장에서는 하늘이냐, 땅이냐, 하나님이냐, 육신이냐, 이 절체절명의 기로에서 선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고, 인간을 특별하 존재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흙으로 만든 인간에게 하나님은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은 흙으로 만들어진 육신이지만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다른 생명체와 달리 인간에게는 하나님 당신의 생명의 호흡을 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흙으로 만들어진 육신이 살아있는 생명체, 즉 생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생령이란 단어에 주의할 문제가 있습니다. 생령이라면 살아있는 영, 즉 영적 존재로 오해할 수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를 네페쉬 하야, 즉 살아있는, 호흡하는 생명체라 했습니다. 영문 성경에서도 이 부분을 living soul이 아니라 living being이라 했습니다. 살아있는 존재라는 말이지 살아있는 영이란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생령이란 번역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에 관한 부분은 오히려 1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한 부분에서 영성을 찾아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흙으로 만들어진 육신이지만 하나님이 직접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만드셨다는 사실에서 다른 생명체와 달리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다시금 확인하게 하는 대목이며 그러기에 27절의 의미도 우리에겐 무한한 감격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학을 하고 시를 쓰는 우리로서는 이 대목에서 중요한 시학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의 단계는 아직 숨쉬고 맥박이 뛰는 생명이 있는 인간이 아니라, 생명이 없는 단지 흙덩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흙덩이에 생기, 즉 생명의 호흡인 숨을 불어 넣으니까. 생명 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문학작품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흩어진 단어들을 모아놓았다고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산문에서는 일정한 플롯과 스토리가 있어야 산문의 생명을 얻게 되고 시에서는 리듬과 메타포가 있어야 살아 있는 시가 되는 것입니다. 시에서 리듬은 독자에게 생명력 있는 환기력을 갖게 합니다. 따라서 시의 생명력은 리듬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흙으로 만들어진 무생명의 인간에게 불어 넣은 생명의 호흡 즉 네폐쉬 하야도 따지고 보면 들 숨과 날 숨의 연속적인 리듬입니다. 따라서 모든 생명체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생기란 다름 아닌 리듬을 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리듬은 생명체들만이 아닙니다. 우주 만물의 질서도 리듬입니다. 따라서 리듬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고 생명이고 그러기에 시도 리듬이 있어야 살아있는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창 1:27에서 하나님을 닮은 영적인 인간을 만드시고, 2:7에서는 흙으로 육적인 인간을 만들어 영과 육을 갖춘 온전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관심은 여기에서 끝내지 않으시고 그들이 거처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까지 마련하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선망하고 그리워하는 에덴동산입니다.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여기서 동방이란 창세기 기자인 모세가 있는 위치에서 동쪽이란 말이며 그 다음에 이어지는 4대강의 설명으로 보아 학자들은 이곳을 세계 4대 문명 발생지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 복락이란 뜻이며, 동산은 울타리를 치다, 보호하다의 어원을 갖고 있으며 이를 파라다이스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기쁨의 낙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상향이 됩니다.

 

에덴 동산에 대한 묘사는 29절에서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시니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있고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만물을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였는데, 에덴 동산에 대해서는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풍부한 곳이라 했습니다. 이는 철저히 인간이 살기에 좋은 조건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에덴 동산으로부터 네 강이 사방으로 흐르는데 첫째는 비손강으로 금은 광물이 풍부한 곳입니다. 둘째는 기혼강으로 수량이 풍부합니다. 셋째로 힛데겔인데 이는 티그리스강을 말하며 넷째는 유프라데스 강으로 모두가 메소포다미아 문명을 이끈 비옥한 지역입니다.

 

이처럼 에덴 동산은 아름답고 먹을 양식이 풍부하며 기후는 온화하고 땅은 수량이 많고 비옥한 옥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최초로 창조한 그 사람 아담에게 거기서 놀고 먹기만하며 살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낙원이니 천국이니 이상향이니 하는 곳은 생노병사가 없고 늘 먹고 노는 편안한 곳으로 아는데 에덴에서는 15절 그것들을 경작하여 지키게 하였으며 20절 아담은 그것들의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습니다. 에덴에서는 일정한 일을 했다는 말이 특이합니다. 그리고 이 대목은 128절에서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말과는 어감이 다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경영권은 어디까지나 경작하고 지키는 것, 즉 잘 관리하고 보존하는 것이지 정복하고 파괴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을 읽을 때면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에덴동산과 선악과에 관한 말씀입니다. 선악과가 우리의 운명을 뒤바꿔 놓은 비극적인 사건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시를 쓰고 문학을 하는 우리로서는 창세기 29절을 보면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와 함께 있는 생명나무의 존재와 의미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2:9절 함께 봉독하실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이 말씀을 보면 에덴 동산에는 선악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도 있었고,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에덴 동산에 선악과 나무만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에덴 동산엔 분명 생명 나무와 선악과 나무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관심은 생명나무에는 관심이 없고, 온통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었던 에덴동산에서 지상으로 쫒겨나 모두 죽음의 무서운 저주를 받게 된 것이 바로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은 까닭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에서 선악과에 편중된 논의는 우리가 선악과 못지않게 중요한 생명나무의 존재와 의미를 망각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서 선악과 못지않게 중요한 생명나무의 의미를 영영 잃게 되는 것이며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방치하는 것이라는 데서 생명나무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해가 요구됩니다.

 

생명나무는 the tree of life 글자대로 생명의 나무입니다. 생명의 나무란 그 과일을 먹으면 생명을 계속할 수 있는 나무입니다. 그야 대부분 과일들은 먹으면 영양이되어 생명을 연장합니다. 그러나 여기 생명나무는 육신의 영양이되는 보통의 과일나무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 중앙의 오른편엔 생명나무, 왼편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각각 세워 놓으시고 동산의 과일은 네가 마음대로 먹되 왼편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과일은 먹지 말라 먹으면 죽으리라. 이 말씀을 역으로 말하면 선악과를 먹으면 죽지만 생명나무 과일을 먹으면 죽지 않으리라 이지요. 에덴에서 죽지 안는 다는 것은 바로 영생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는 영생나무입니다. 생명나무가 영생나무인 것은 창3:22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아내면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여기서 결정적인 대목은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에 있습니다. 생명나무 과일을 먹으면 영생할 것이니 내어 쫒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에덴 동산에는 한쪽엔 영생을 보장하는 생명나무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죽음의 저주를 받게 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생명나무요 다른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나는 영생과 하나는 선악과라면 뭔가 논리적으로 맞지가 않습니다. 생명의 반대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생명나무와 죽음나무, 또는 영생과와 사망과라 해야 대립관계가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영생이냐 죽음이냐를 결단하는 갈림길에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대용어를 사용했을까.

 

이 부분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 부분을 제대로 풀 때 에덴 동산을 통한 하나님의 인간 창조, 그 원대한 구상과 진의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으며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신앙의 핵심이 무엇인가도 밝혀 질 수 있기에, 에덴동산에서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영생이냐, 죽음이냐 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이냐 죽음이냐 즉 영생이냐, 심판이냐의 갈림길에서 영생의 길을 모색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왜 에덴동산에서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인가 그 비밀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곧 죽음으로 가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게임에는 패자부활전이 있습니다. 패자에게 한 번 더 승리의 기회를 주는 것이지요. 죽음은 모든 것의 끝입니다. 그러기기에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선택 여부를 통해 죽음으로 가는 것을 막고자 하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태어난 아담과 이브에게 주어진 최초의 실존적 과제는 생명나무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냐, 이는 하나님과 더불어 생명나무의 과일을 먹으며 영원히 에덴에서 살 것이냐, 아니면 죽음의 형벌을 받을지라도 선악을 구별할 줄 아는 인간 중심적인 삶을 살 것인가 하는 양자 택일의 갈림길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본질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생명이냐 죽음이냐 인데, 여기서 죽음은 선악을 아는 나무의 선악과를 먹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고민해야 했던 선택의 딜레마는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똑 같이 주어진 인간 실존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선악을 구별하고 너와 나를 판단하는 지식과 기술과 물질의 인위적이고 문명적인 삶을 선택하여 그곳에서 경쟁하고, 싸우고 싸우다 마침내 쓰러지고 마는 이성적인 인생을 살 것인가. 선악의 구별이 없고, 너와 나의 차별이 없는 감성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순종하며 현실을 초월한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영원한 에덴에서 거룩하게 살 것인가 하는 양자 택일의 고민이 오늘의 우리에게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학을 하고 시를 쓰는 우리에게 있어서 에덴 동산과 그곳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삼각관계는 우리가 왜 시를 써야하며 어떻게 써야 하며 시의 목적은 또 무엇인가 하는 시학의 근본적인 길도 함께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에 크리스천 문인으로서는 에덴 동산의 말씀을 보다 주의 깊게 경청하여야 한다는 것이 저의 소신이고, 제 시학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저는 평소에 시학의 근본은 에덴이라 하였고 에덴의 시학이라는 평론집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시는 근본적으로 객관적 세계의 표현이 아니라 주관적 세계의 표현입니다. 여기서 주관적이란 사물을 이성적으로 과학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감성적으로 느끼는 세계입니다. 왜 시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주관적으로 감성적으로 느끼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세계는 사물의 존재가치를 구별하고 판단하여 우열을 정하고 서열을 정하여 마침내 경쟁을 일으키고 분열하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세계는 너와 내가 하나일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물들은 모두 독립된 가치를 지니고 있어, 분열되고 대립되고 그래서 마침내 경쟁하고 싸우다 죽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감성의 세계는 사물을 우열로 나누지 않고, 인간을 선악으로 나누지 않고, 화합하고, 통합하여 세계를 하나로 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시정신이기도 합니다. 시는 분열된 세계를 통합하고 하나 되기 위하여 메타포라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내 마음은 호수요여기서 마음과 호수는 이성적으로 객관적으로 보면 분열된 세계입니다. 두 사물 간에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마음과 호수를 하나로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하나님과 목자도 이성적으로 지적으로 보면 분열된 세계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신이고 목자는 양치기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를 통합하여 하나님과 목자를 동일시 하였고 그리하여 멀리 계신 하나님은 친절한 목자가 되어 감성적으로 느끼는 대상이 됩니다. 이성의 세계와 감성의 세계, 과학의 세계와, 시의 세계는 이처럼 분리냐 통합이냐 하는 양극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와 선악을 할게 하는 나무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생명나무와 죽음의 나무를 두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나무라 하지 않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가 무엇일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영어 성경에서는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성경은 knowledge알게하는이라고 번역했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이는 선과 악을 구별하고 판단하는 지적 능력, 다시 말하면 이성적 사고를 표현한 말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창 2:9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각주 1)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각주 1)을 보면 선악 지식의 나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란 사실은 선악지식과를 말하며 이는 인간이 무엇을 판단하고 비교하고 분석하는 지적인 사고, 이성적인 사고를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들의 판단기준을 세워 사물을 판단하고 비교하고 선하고 악함을 구별하는 지적인 행위 이성적인 행위, 인간은 이러한 행위를 가장 휴머니티한 인간 중심적 행위라고 자부하지만, 그리고 이를 문명이라고 하지만, 선악을 구별하는 이성적 사고는 끝내 경쟁하고 싸우다 죽음으로 가는 길임을 이미 에덴동산에서 계율로써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역사학에서는 근대를 르네상스 이후 휴머니즘 시대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 중심의 중세시대에서 벗어난 인간중심 시대라는 것인 데요 이들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간중심의 역사를 선언할 수 있었던 유일한 무기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선악을 아는 지식 즉 이성적 판단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근대 이후의 역사를 이성중심주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이성중심주의는 오늘의 기술과학문명을 주도하고 있지만 유물주의 공산주의 물신주의 현세주의 생태파괴 등 갖가지 부작용으로 지구가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태초의 에덴동산, 이 아름답고 풍요롭고 행복한 동산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고 싶으면 선악을 구별하는 지식의 나무 즉 이성적 사고, 지식의 세계, 문명세계를 선택하지 말고, 그 반대인 생명나무의 과일을 먹으며, 즉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 감성의 세계, 분열이 없고, 경쟁이 없고, 오직 하나님과 더불어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화합의 세계, 사랑의 세계를 선택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화합의 세계, 사랑의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었음을 다시 구체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바로 여자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창 2:18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이것은 모든 생명들의 음양조화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 음양의 관계, 남녀나 암수의 관계는 서로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라 둘이지만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초 여자의 창조에서 밝혀집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여자를 창조할 때 아담처럼 흙을 빌어 만들지 않고 아담의 갈빗대로 만듭니다. 이것은 여자를 남자의 종속적 존재로 만들었다기 보다 남자 아담과 여자가 한 몸인 것을 말하려는 것이라 보아야 하겠습니다. 남자의 몸으로 만들어진 여자, 그러니 남녀는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남녀가 애당초 한 몸이기에 서로가 동질감을 느끼고, 소중함과 사랑을 느낍니다. 그것을 잘 드러낸 말씀이 창2;23입니다. 함께 봉독하실까요.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얼마나 훌륭한 시입니까. 성경에서 최초의 시는 아담의 이 최초 여자에 대한 찬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를 보면 여자는 아담과 한 몸입니다.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라이는 여자를 뼈 중에 뼈, 살 중에 살이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하여 시적으로도 성공한 것이지만 여자를 남자의 뼈와 살로 동일시 함으로써 남녀는 한 몸이며 가장 소중한 사람, 가장 사랑스런 사람이라는 뜻을 정말 시적으로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남녀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입장은 창 2:24 결혼의 정의에서 다시 강조 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결혼도 둘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에덴동산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창조 섭리는 하나님과 인간과 우주 만물이 서로가 분열하고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고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하나가 되고 한 몸이 되려면 상대의 장단점을 분별하고 선악을 따지는 이성적사고로는 불가능합니다. 모든 사물이 평등하고 동등하다는 감성적 사고, 바로 시적인 사고에서만 가능합니다. 이점을 지적하고 있는 말씀이 창세기 225절입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벗어도 부끄럼을 모르는 상태, 어린이는 벗어도 부끄럼을 모릅니다. 이성과 지식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기전 아담과 그의 아내도 그랬습니다. 이러한 상태를 키엘케고르는 순진무구의 상태라 하였습니다. 전혀 인간적인 때가 묻지 않은 상태, 그것은 선악을 구별하는 이성적 판단, 인간적인 지식, 윤리, 관습, 이런 것 이전의 상태입니다. 사물을 인간의 척도로 비교하고, 평가하고 그래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쟁하는 모든 세속적인 사고방식, 그 이전의 상태입니다. 그것이 에덴이고, 그것이 생명나무열매가 갖는 상징적 의미이며 하나님이 바라시는 인간 창조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의 세계도 너와 내가 하나 되는 세계를 추구하고, 영원한 세계를 추구하고, 동심처럼 때 묻지 않은 순진무구한 세계를 추구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생명나무와 에덴 동산을 통하여 순진무구한 상태에서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나 시인이 세속적인 모든 이기심과 탐욕으로 분열된 세계를 통합하고 화합하여 물심일여, 물아일체의 경지를 꿈꾸는 마음에는 공통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의 세계란 바로 에덴의 세계이며 에덴은 바로 시학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구원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게 된 인간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나무와 죽음의 나무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행하게도 죽음의 나무 바로 선악을 아는 나무를 선택함으로써 죽음의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당면 과제는 이 죽음의 저주를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죽음의 나무를 선택했기 때문에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음의 형벌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특별사면, 특별한 은혜만이 가능합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특별 사면, 특별한 은혜, 그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구원받고 마침내 도달해야 하는 곳이 바로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입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그곳을 화염검으로 막았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에덴, 새 예루살렘, 새 하늘, 새 땅을 마련한 것이지요. 그러나 새 하늘, 새 땅도 그 속성은 생명나무가 있는 에덴과 동일한 것입니다. 바로 너와 내가 구별 없고 처음과 시작이 없고, 오직 사랑과 화합으로 가득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나라를 우리는 죽어서만 가야하는 것인가요. 살아서 그러한 하늘나라를 앞당기는 길은 없을까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고, 그러한 세계를 문자로 그려보려는 것이 바로 우리가 시를 쓰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정말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예수를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시를 쓰는 일까지 더한다면 하늘나라를 앞당기려는 우리들의 노력에 주마가편,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것이며 비단이불에 꽃수를 놓는 금상첨화의 행복한 길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에덴 동산에서 지금은 잃어버렸지만 마침내 우리가 찾아야할 영원한 생명나무를 소망하며 동산엔 생명나무도 있었네요이런 시를 보았습니다.

동산엔 생명나무도 있었네요

내 딛는 자국마다

복숭아 꽃잎들이

방긋방긋 웃어주네요

강가엔 노루 사자들

함께 뛰어 놀고

사철 과일들이 넘쳐나는

동산의 한 가운데에는

생명나무도 있었네요

 

따스한 햇살은

무성한 잎들과 뺨을 부비고

바람은 가지 끝에 걸터앉아

아기 생명들과 노래하는

동산의 한 가운데에는

보기에도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생명나무도 있었네요

 

목마름도 배고픔도 없고

원망도 슬픔도 없는 나라

너와 나 차별도 부끄러움도 없는 나라

너는 내 뼈 중에 뼈요

나는 네 살 중에 살일지니

우리 모두 하나 되어

덩실덩실 춤을 추며

당신만을 노래하는 에덴의 나라

동산의 한 가운데에는

말씀처럼 시처럼 영원한

생명나무도 있었네요/홍문표

기도하겠습니다.-태초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그중에 인간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생명나무와 에덴동산을 주셨던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저희들 죄를 범하고 에덴을 지키지 못하여 죽게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다시 새 에덴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더욱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저희들 기필코 새 에덴을 회복하게 하소서 새 생명나무를 회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시의 생명력은 리듬에 기초하는 것이며 이와 관련한 에덴과의 접목은 리듬이란 곧 생명의 호흡인 들 숨과 날 숨의 리듬이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호흡의 리듬이 시학의 리듬이 되는 것이며 이것은 시의 생명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시인은 무생명의 흩어진 단어들을 모아 이를 리듬있게 배열함으로써 감동력을 가진 시, poetry를 창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에덴이 거론된 성경과의 관련(1:27)에서 흙으로 육적 인간(2:7)을 만듦으로써 아담이 거처할 공간이 곧 에덴동산(2:8)인 바 선악과와 관련된다. 그런데 에덴동산에는 동산 가운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종류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홍문표박사는 생명나무(the tree of life)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을 표명하면서 영생을 얻는 방법은 생명나무과일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에 있음을 예리한 이성으로 지적한다. 이 이성적 사고는 더욱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렇다면 에덴동산에는 한쪽에 영생을 보장하는 생명나무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죽음의 저주를 받게 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다는 말이며 이들 각각의 나무에 매달린 과일은 하나는 영생으로 다른 하나는 선악과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는 생명나무요 다른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나는 영생과 하나는 선악과라면 뭔가 논리적으로 맞지가 않습니다. 생명의 반대는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생명나무와 죽음나무, 또는 영생과와 사망과라해야 대립관계가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영생이냐 죽음이냐를 결단하는 갈림길에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라는 대칭어를 사용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 홍문표 에덴의 시학

 

기독교의 본질이 갖는 영생이냐, 죽음이냐의 두 개의 분리는 동시에 구원이냐 죽음이냐이며 영생이냐, 심판이냐이어서 이 갈림길에서 홍문표 박사는 오늘날의 현실이 후자의 이성중심의 사회로 발전하면서 경쟁하고, 싸우고 싸우다 마침내 쓰러지고 마는 지상적인 인생의 결핍이 아닌 감성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순종하며 현실을 초월한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영원한 에덴에서 거룩하게 하는 철학을 얻는다.

때문에 모더니즘 계열의 서정시인 홍문표 시인이며 신학자이며 문학자로서의 본분뿐만 아니라 문학박사로서의 철학을 제시한다. 그것은 왜 시를 써야하며 어떻게 써야 하며 시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시학의 근본 문제가 싸움보다는 화합과 도움의 세계의 길만이 이 세계를 향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이에 에덴동산의 말씀을 보다 주의 깊게 경청하여야 한다는 것이 저의 소신이고, 제 시학의 뿌리이기도 합니다라고 설파하고 있다.

여기에서 부분을 좁혀 에덴의 시학은 시가 가지는 주관적 세계의 표현이란 감성적으로 느끼는 화합하고, 통합하여 세계를 하나로 보여주는 방법을 메타포라는 방법의 우선을 통하여서임을 제시한다. 시가 가지는 시적 우수의 결정권인 이 메타포는

내 마음은 호수요여기서 마음과 호수는 이성적으로 객관적으로 보면 분열된 세계이지만 시인이 마음과 호수를 하나로 보고자 함에서 아름다운 시가 탄생하고 특히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에서도 하나님과 목자도 이성적으로 지적으로 보면 분열된 세계이지만 하나님을 감성적으로 느낀 다윗으로 하여 다윗은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그 깊은 가까움까지 갈 수 있게 된다.

뚜렷한 분리의 두 세계의 분화에서 사람이 영생하는 방법은 분리가 아닌 화합임을 제시한 홍문표의 시학이자 철학은 이성의 세계와 감성의 세계, 과학의 세계와, 시의 세계는 이처럼 분리냐 통합이냐 하는 양극점에서 인구에 회자하는 에덴동산을 예를 들어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와 죽음의 나무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선택권리를 잘 활용한다. 이처럼 홍문표 박사는 에덴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하고 싶으면 선악을 구별하는 이성적 사고, 지식의 세계, 문명세계를 선택하지 않고, 그 반대인 생명나무, 즉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 감성의 세계, 분열이 없고, 경쟁이 없고, 오직 하나님과 더불어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화합의 세계, 사랑의 세계를 선택하여야 극서이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셨던 목적에 따르자는 에덴시학의 논리를 세운다.

이 논리는 성경에서 성경필자의 의도대로 화합의 원리를 아담과 그의 아내에서 역설하게 되는데 이 부분을 홍박사는 에덴의 시학 원리의 중요정점으로 제시한다.

 

하나가 되는 화합의 세계, 사랑의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었음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바로 여자의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창 2:18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이것은 모든 생명들의 음양조화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 음양의 관계, 남녀나 암수의 관계가 서로 대립된 관계가 아니라 둘이지만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초 여자의 창조에서 밝혀집니다. 하나님은 최초의 여자를 창조할 때 아담처럼 흙을 빌어 만들지 않고 아담의 갈빗대로 만듭니다. 이것은 여자를 남자의 종속적 존재로 만들었다기 보다 아담과 여자가 한 몸인 것을 말하려는 것이라 보아야 하겠습니다. 남자의 몸으로 만들어진 여자, 그러니 남녀는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서로가 한 몸이기에 동질감을 느끼고, 소중함과 사랑을 느낍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아담의 시를 통해 나타납니다. 2:23

 

아담은 반려자 여자에 대하여 너는 내 뼈중에 뼈요 내 살중에 살이라는 시적인 메타포를 사용했습니다. 얼마나 시적입니까. 성경에서 최초의 시는 아담의 이 최초 여자에 대한 이 찬가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를 보면 여자는 아담과 한 몸입니다.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라는 표현에는 가장 소중한 사람, 가장 사랑스런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남녀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입장을 창 2:24 결혼의 정의에서 다시 강조 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결혼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구별된관계에서 구별이 없는 관계 선악을 아는 나무의 관계에서 생명나무의 관계로 된 합함을 의미합니다.

 

홍문표 박사는 분리의 두 세계에 대한 관점을 부부의 관계로 조명하면서 분열하고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고 한 몸이 되는 관계에서 이성적 사고의 최대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키엘케고르가 지적한 순진무구의 상태를 지적하면서 때가 묻지 않은 상태, 그것은 선악을 구별하는 이성적 판단, 인간적인 지식, 윤리, 관습, 이런 것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상태가 시학의 원리가 되는 관점에 서게 된다.

그리하여 오늘날 새 하늘이니 새 땅이니 혹은 새 평화라는 지적이 새로운 어떤 세계를 개롭게 다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시가 지닌 리듬과 메터퍼를 통해 하나님이 흙으로 만든 인간에게 주었던 최초의 생기 the breath of life를 주셨던 그것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이 회복의 관계를 홍문표 박사는 분열의식, 곧 냉정한 사고로서 얻어낸 결론이 곧 에덴의 시학이고 에덴으로 돌아가자는 철학이다.

따라서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가진 시인이 쓰는 시는 물심일여, 물아일체의 경지에서의 에덴의 세계가 된다. 곧 시를 시를 쓰며 마음의 즐거움과 기쁨의 시학이 있기에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지에서 사는 시인의 행복이 되는 것이다. 홍문표 시인은 -선악을 알게하는 선악과의 세계가 아니라 생명나무의 영생과의 세계라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제가 평생 시학을 연구하고 창세기를 읽으며 깨달은 에덴의 시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홍문표 박사의 분리에 대한 깊은 관심은 그 깨달음의 경지가 오히려 철저한 분리를 겪은 깊은 냉철에서 점점 더 분리의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감성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한 길이 그의 신앙생활과 동일시되는 철학성의 타당성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로하여 죽음의 저주를 벗어나는 길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특별 사면, 특별한 은혜, 그것이 하나님의 구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진 원조에서 벗어나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죽어서 천당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서 얻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고, 그러한 세계를 문자로 그려보라는 것이 바로 시를 쓰는 에덴의 시학이라고 강조한다.

 

 

 

 

 

 

 

 

 

 

 

 

(1) 하나님이 숨쉬게 하는 비손 거기

 

먼저 이 네 강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관점에서 조명되어지게 되어 진다. 왜냐하면 강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나오지 않고 있어서이다. 따라서 어떤 서열, 즉 첫째강, 둘째강을 표기하기 위한 개념이 처음의 한 강이라 한 비손에서는 없다. 번역에서는 첫째 강이라 하였다. 이는 잘못된 번역이다.

원문은 그 하나 ד󰖎󰔟󰕘 ם󰚅(쉠 하에하드/그 하나 거기, 2:11)이다. 그 이름은 비손 ן󰚇י󰘫(비손)이다. 글자가 가지는 의미로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입으로 끝까지 말씀전하는 사역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숨 쉬게 하기 위하여 4강으로 분류되어 흐른다는 가정을 할 때 왜 강이라는 말이 나오지 아니하고 대신 '그 하나의 거기'로 비손을 소개하고 있는 가이다. 이 비손의 위치는 현재 확실한 곳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땅 속으로 들어갔다는 설도 있다. 곧 유토피아란 의미가 전해지듯이 이 세상에서는 없는 하늘나라 에덴이기 때문일까.

이에 문맥으로 발견하려는 비손 그 하나 거기는에서 발견되어지는 문장텍스트에서 숨 쉼 글자 ה(헤트/숨쉼)를 글자 양쪽에 표시한다. 이 숨 쉼 사이 안에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상징글자 ז(자인/연장)이 있다. 따라서 일반적 개념으로도 위 두 글자사이에서의 연장이라면 성경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을 상징하여 숨 쉼이라는 것도 예수님을 통해서 숨을 쉴 수 있음을 지시한다.

문학 언어로 구성된 이 한 강은 모래땅이 숭숭 구멍이 나 있음을 예로 한다. 성경은 모래땅에서 금이 만들어지는 이야기를 문학적 이미지로 엮는다. 곧 성경은 이 때 연장, 곧 예수님 상징을 사용하는데 원문 하자하브 ב󰕗󰖆󰕘(하자하브/금이 있는, 2:11)로 한다. 곧 숨 쉼 언어 ב󰕗󰖆󰕘(하자하브)󰕗 󰕘(하 하) 곧 숨 쉼 의미가 2회이다. 이 숨쉼이 양쪽에 모두 사용되면서 그 사이에 연장 󰖆(자인/연장)를 끼워 넣었다. 한국인들은 하자라는 말을 잘 사용하는데 바로 연장을 우리가 사는 땅. 곧 하나님의 집 안에 넣어 우리를 숨 쉬게 하자는 것이다. 곧 예수를 만들기 위한 강이 비손강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기 위한 사역장이 어서 곧 흩어지는 일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흐른다는 의미를 지닌다. 비손강은 글자그대로 비젼의 강이며 글자풀이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입으로 영원히 말씀을 전하는 의미이다. 문학적 표현으로는 쓸모없는 모래땅을 전부 아주 많이 숨 쉬게 하기 위해 금 곧 말씀으로 싸 바른곳이라는 문학글자이다. 히브리어는 이 뜻글자로서 그 뜻을 그대로 전하는 차원 높은 문학의 은유용어로 된 비손강이다.

을 만들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곧 모레에서 금을 만드는 노력이다. 사금이 정금이 되려는 문학용어의 이 문장은 마치 그 모습이 빙빙 돌며 춤추는 모습이다.

성경은 주의 계명은 금보다 좋으리라 하는데 이 때 호마노(2:12)가 또 두 번의 숨쉼 언어를 다시 나란히 놓는다. 원문은 하솨함 ם󰕘󰚐󰕘(하쇼함/호마노, 2:12)이다. 히브리어의 이 기호 ם󰕘󰚇󰕘는 양쪽에 숨 쉼글자 󰕘(/숨 쉼)가 있고 그 사이에 예수님이 두 손을 들고 십자가의 달린 모습의 󰚇(/연단)이다. 모습을 보면 숨 쉼을 양쪽으로 하고 그 사이에 두 손을 높이 든 󰚇 기호이다. 곧 예수를 상징하며 이로 하여 우리는 숨을 쉴 수 있는 무리 중에 하나를 예시한다. 이 때 예수님뿐만 아니라 무리, 곧 사역자들의 히브리어 복수 물 ם(/)을 통하여 사역자가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음을 예시한다. 홍문표도 사역자의 무리 중의 한 분이다.

에덴의 시학은 주의 계명을 커다랗게 하는 사역이다. 커다랗다의 뜻은 빙빙돌며 움직이되 위로만 올라가 드디어 은혜를 갚는 의미이다. 사금이 금이 되는 과정은 모래가 빙빙돌면서 차츰 끈기와 노력으로 위로 춤추듯이 위로만 올라가 금으로 연단되어 나온다.

교회에 첫발을 디디어 60년동안 이어온 홍문표목사는 하나님 일 사역이 점점 그 물이 올라 하나님의 큰 사역자가 되는 과정에 참여한 사역자 중의 한 사람이다. 오직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한 길의 에덴시학자(詩學者)이다.

비손이란 뜻은 '퍼지다' '자라게 하다'는 뜻이다. 타인을 자라게 하는 말과 행동이 나오는 존재라는 뜻이다. 홍문표는 그 존재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런 존재로 퍼지고 자라서 홀로 있지아니하고 나선형으로 빙빙 돌고 있다.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고 빙빙도는 우회적 방법의 시학이론을 통하여 물(생명, 언어)을 먹이며 나선형으로 빙빙 돌아 대상을 적시고 있는 에덴의 시학자이다. 빙빙돌면서 그 정점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은 에덴으로 가는 길이며 이에 에덴시학()이 있게 된다.

홍문표는 현재 학문적인 문학과 신학, 사업의 잡지와 한국문인교회를과 밤매향자연농원을 현장으로 한다. 이 하나님 사역의 4는 굳이 에덴의 4강과 연관성이 없다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사역의 4곳이다. 홍문표의 호 동천이 갖는 내해, 곧 유업은 히브리어 나할이 제시하는 분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사역은 하나님이 주신 분깃이다.

실제 홍문표 교수의 부모의 이름이 갖는 세창(世昌)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은유적으로 바다 이미지이다. 이 바다에서 아들의 물려받은 기업은 문법으로 히필형 부정사 연계형 곧 물이 먹여지다 תוֹק󰚉󰕘󰗡(레하쉐코트, PVHNG)에서 제시하는 바와 같이 홍문표에게 물 먹여진 이미지는 물에 빠지는 형상이다.

곧 물에 문이 빠지는 형상이다. 말씀에 빠지는 물과 온갖 세파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후자에서 하나님의 구원, 곧 어릴 때의 교회에 가기 시작함으로써 물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에서 벗어나 물위를 걷기 시작한다. 말씀을 붙들고 물 위로 걷고 있다. 하나님에 의하여서, 건져진다. 현재에도…….

 

창세기 210장의 전달메시지처럼 사방, 네 물길을 알아봐 헤메는 홍문표교수의 삶은 에덴동산에서 강을 넷으로 분리하듯이 유업을 넷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에덴의 강에 빠져 있으면서 이 세상의 온갖 물에서 건져지기 위해 온 생을 몸으로 살아가는삶이다.

 

요행으로 살기 보다는 몸 전체로 살고 싶다.

 

홍문표는 몸 전체로 물 위에 떠서 하나님 말씀의 촛불을 켜 들고 열정의 불 모양으로 물 위에 떠서 흘러간다. 이 네 강과 홍문표와의 연계성은 동천이 가지는 동쪽으로 흐르는 강의 호에서이고 성경과 관련하여서는 에덴의 네 강이 흘러서이며 결정적인 연계성은 내해 곧 유업과 관련하여서이다.

'내해의 개념은 한국말의 가 흐르는 물의 개념인 동시에 나의 것이라는 개념이지만 성경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신 유업을 말한다. 홍문표는 실제 네 개의 유업, 문학과 신학과 그리고 잡지와 한국문인교회를 운영한다.

성경과 문학과의 접근은 일차적으로 문학의 선배 이상시에서 찾아진다. 시인이 네모 모서리들을 모두 떨어져 있게 창작하여 절대적 그인 시적화자가 숨어 있으면서 뚫려 있는 사()방향 모두를 통해 대상을 숨 쉬게 하면서 살아남게 하고 있다.

 

* 네모 모서리들이 떨어져 있어서 숨쉼을 상징하고 있다.

- 오감도 시제 5

문학에서는 한국의 이상시의 시제 5호에서 사람의 모습을 제시한. 내용이 흥미를 중심하면서도 주제는 숨기고 있다. 문학은 이미지를 많이 사용한다. 이상시 시제 5는 네모 모서리를 열어 사람이 숨을 쉬게 하는 이미지이다.

이처럼 하이퍼성으로 접목되는 나변의 이유가 분명해지는데 자동차 부품처럼 흩어져 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 어디에서든지 그 빛을 발하게 된다.

 

 

 

 

 

 

 

 

 

 

2) 두 번째의 강

계속해서 성경은 두 번째를 강조하는데 변화되어 탈바꿈되는 자리의 강이다. 왜 성경은 네강의 설명에서 두 번째로 처음 강을 표시하였을까. 기혼강은 구스 땅을 휘돌아 싸안고 돈다. 바로 구스 땅이 검은 땅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그리고 에덴동산의 두 번째 자리로서 두 번 쩨 강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이 둘의 긴장관계를 풀자면 두 번째의 강이 언급되는 일이 무심히 혹은 우연히 제시되는 표시되는게 아니다. 거듭남의 이미지가 가해지는 성경의 2회 자리는 두 번째 강을 숨 쉼의 표시로 두 번째의 강 하나하르 ר󰕗󰘅󰕘(하나하르/, 2:14)로 표시한다.

이 때 처음 강 비손과 같이 숨숨 표시를 2회 사용하여 처음 비손과 긴밀성에 있음을 제시한다 .ר󰕗󰘅󰕘(하나하르/, 2:14)󰕗 󰕘(하 하/두 번의 숨쉼 의미)는 여호와나 여호와의 구두어 예흐예에서 보여주던 2회 리듬 ה ה(흐 흐/ 두 번의 숨 쉼 의미) 그대로이다.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인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숨 쉬게 하려는 강이다.

역시 주인공은 예수님이다.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들로 하신 일에 오로지 은혜를 갚기 위한 강 기혼 ןוֹחי󰔹(기혼)에서 분출하다’, ‘솟아나며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작은 골짜기 지역을 흐른다. 일찍이 낮고 낮은 마굿간에서 태어난 예수님이듯이 홍문표 시에서 정상의식을 가장 낮은 곳에서 찾듯이 두 번째의 강은 졸졸흐르며 아주 낮은 곳에서 아름다운 무늬를 놓는 제잘거림의 나할/시냇가)로 변한다.

성경의 강은 기본형 나하르나할 두 개가 있다. 기본형 나하르는 에덴의 동산에서 흐르는 강으로 보여주면서도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작은 시냇물이며 기업이며 유업의 뜻을 지닌 나할을 숨겨두시고 예수님이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 중의 한 분인 홍문표를 통해 졸졸 흐르며 반짝러리는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보여주기의 나 할 일은 내 해이면서 내 할 일이다. 내가 가진 내해와 ’()의 하이퍼성 접목 되는 시냇물 나할/시냇물)은 이제 적은 시냇물에서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는 신앙의 공동체를 형제애로 묶게 하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 시냇가나 로 불리워지는 이 나할은 유업이나 기업을 가진이가 내 할 일 의 나 할일을 찾아 하나님의 일을 묵묵히 할 따름이다. 구스 땅과 같은 어두웁고 검은 곳에서 일한다.

시냇물과 기업의 연관성은 참으로 신비한 관계이다. 기업은 나눔에 그 깊이를 더한다. 이에 대한 하이퍼성은 하나님 믿은 이의 유업이나 기업으로 그 의미를 덧붙이면서 홍문표의 호 동천이 지니는 유업의 의미와 하이퍼성으로 연결된다. 호 동천(東川) 또한 처음의 호 한 별에 이어 두 번째이다. ‘한 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해당한다는 의식에서 더 작은 길을 찾아 두 번째의 호를 동천(東川)으로 하였다. 성경에서 2회 이름이미지는 항상 많이 사용되는 마크이다.

기혼강은 예루살렘 성 밖의 동쪽 기드론 골짜기에 졸졸졸 흐르면서 예루살렘에 물을 공급하던 수원인 바 솔로몬이 부름을 받아 왕이 된 곳을 흘렀다. 성경의 구스 땅은 검다는 뜻과 더불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어야 하는 이유가 수반된다. 예수님은 검은 땅에 오시어 예수님만이 받으실 수 있는 잔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 이 땅에 그 중심버팀목이 되는 의미를 지닌 구스땅의 기혼강은 예수님이 은혜를 갚은 의미의 강이다. 기혼강은 은혜가 차고 넘쳐 난다는 뜻으로 하여 이 죄악의 땅을 힘차게 차고 넘치어 씻어내는 역할이다. 죄악의 땅에 하나님의 사역은 모든 하나님의 일 사역자에게도 해당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차고 넘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는 체험으로 하나님의 사역자 홍문표는 그 일생을 에덴의 시학()에 머물게 하였다.

학설로는 지금의 이란 땅인 페르시아에는 구스인이 살았다는 것이고 역사에서는 그들이 세운 국가를 카사이트(Kassite) 또는 카슈(Kassu)라 불렀는데, 카슈가 성경에서 말하는 구스라는 점이다. 그러나 구스(카슈)인은 이사야 18장에 기록된 말씀처럼 홍해를 건너 아프리카로 떠나갔으며, 그 땅에 지금은 페르시아인들이 들어와 있고, 기혼강도 그 이름이 없어진 상태이지만 역시 에덴의 시학자 홍문표와 같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이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고 일생을 불사른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 강을 카룬강이라고 한다. 직선 거리로는 300km도 안 되는 아주 작은 강으로 시냇물에 가까우며 이란 땅을 굽이굽이 돌아 무려 820km에 이른다. 이란 사람들의 젖줄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온 세상에 굽이굽이 흐르는 이 길은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 흐르면서 예루살렘 강줄기가 되기 위해 탈바꿈하면서 유프라데강을 향하여 흐른다. 드디어는 권위의 강으로 인식되듯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말씀을 든든히 잡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지키는 유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면서 빛나고 있다.

 

 

 

 

 

 

 

 

 

 

 

 

 

 

 

 

(3) 셋째 강

 

에덴의 셋째 강은 물을 내뿜어 터져 나오는 강 힛데겔 ל󰙐󰕋󰕙(힛데겔/2:14)이다. 오직 가슴으로 작은 구멍인 바늘귀의 구멍, 곧 어려움을 통과하여야 하는 강의 흐름이다. 가슴에 있는 말씀이 사역자의 배에서 솟구쳐 오르는 강으로 진리를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열정의 강이다. 강은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오르는 이미지이며 남쪽에서 북방 유브라데까지 가는 강으로, 유부라데 강을 위한 강이다.

홍문표의 호는 동천(東川)이다. 동쪽을 향하여 흐르는 강이다. 성경의 힛데겔은 하드 + 칼로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의미는 날카롭고도 빠르고 신속하고 예리한 물살 이미지의 강이다. 홍문표는 걸음걸이를 아주 빨리 걷는다. 에덴의 셋째강 힛데겔은 아주 빨리 흘러간다. 다니엘은 포로기 때 정월 이십사일에 힛데겔 강가에서 일어난 환상 중에 본 세마포 옷을 입은(10: 4)분을 보듯이 힛데겔은 신속하게 흐르는, 화살처럼 빨리 나는 힘으로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

힛데겔 강은 앗수르 동편으로만 흘렀다. 이 능력있는 힛데겔 강을 오직 죽음의 땅 동편의 사람들만 혜택을 누린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상징한다.

현대의 사람들은 이 강을 성경의 힛데겔의 음역과 가까운 티그리스강이라고 부른다. 이 강의 상류는 범위가 넓으며, 강폭이 유프라데강보다 좁고, 터키 국경과 바그다드와의 고도차가 300m 이상 될 정도로 크기 때문에 강물이 많고 흐르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상류의 강수 상황에 따라 쉽게 범람하면서 화살처럼 빨리 나는 힘이라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힛데겔 강이다.

에덴의 셋째강에서의 동편 강조는 성경에서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숫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43:1~4)라 하였다. 이와 관련한 홍문표의 동천(東川)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과 하이퍼성으로 연계된다.

 

 

 

 

 

 

 

 

 

(3) 넷째 강

 

넷째 강 유브라데 강에 대하여 키레(P. Kyle)는 생명을 살리는 강이라 하였다. 유프라데 강은 말씀을 전하는 입술의 의미이다. 물렌(Mullen)은 유브라데 강과 메소포타미아 두 강이 생명의 젖줄기의 근원이라 하였다. 하나로 모아지는 유브라데 강은 문()과 입술의 의미 곧 말씀과의 긴밀성이다. 곧 홍문표의 문, moon과 하이퍼성으로 연결되어지는 오로지 말씀을 전하기 위해 가는 강 유프라데강은 입으로 말씀을 전하는 강이다. 어원을 같이하는 유브라데 ד󰙟󰘱󰖹(이파레드, 2: 10)와 유프라데 ת󰙜󰘰(페라트. 2: 14)는 열매의 강이다. 말씀의 열매를 상징한다. 참 좋은, 비옥한 유브라데강에 대해서는 그 강물이 어디로 흘렀는지는 성경이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럼으로써 네 강의 중심이 되는 강이다. 이에 대한 이해는 4/4개념으로 1의 의미로 전환한다.

방위로는 사방의 의미이며 성경은 이 사방 곧 4개의 방향에 대하여 언급하며 43위 일체의 개념이 더하여 저서, 동 서 남 북 네 방향 모두 성령이 함께 하게 된다. 12사도와 개념으로 이해 할 때 더욱 확실해진다. 4방향으로 삼위일체이신 셋이 된 12길이다.

유브라데강은 큰 강, 하수(23:31, 1:7, 7:20)이다. 비손강은 사프완에서 유브라데강과 합쳐진 후에 페르시아만으로 흘러간다. 거기서부터 페르시아만까지는 비손강이라 부르지 않고 유브라데강이라 부른다. 기혼강은 코람사르에서 유브라데강과 합쳐지고, 힛데겔강은 쿠르나에서 유브라데강과 합쳐진 후 페르시아만으로 흘러간다. 강이 합쳐진 후에 페르시아만까지의 강은 더 이상 비손강도, 기혼강도, 힛데겔강도 아닌 오직 유브라데강일 뿐이다. 모든 강물은 유브라데강에 귀결된다. 유브라데강의 유프라데 뜻은 입으로 말씀전함의 의미이다. 오로지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함을 성경은 에덴동산의 네 강을 예로 들고 그 문학적 은유로서 제시한다. 신학적 설명으로는 천년왕국 너머에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단에게 넘겨졌던 세상의 권세를 찾아오실 것이며, 만물을 다시 하나님의 권한 아래 두실 것이다. 그러나 홍문표는 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관념을 에덴의 회복으로 보고 있다. 새로운 또 다른 세계가 아닌 절대의 회복을 통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에 맞는 순진무구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 사는 세계라는 관점이다.

에덴동산을 흘렀던 모든 강물이 유브라데강에 귀결되는 것처럼,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 강물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 길 가운데로 흐를 것이다. 그리고 강 좌우에 있는 생명나무에서는 그 생명수로 인하여 달마다 새로운 과실이 풍성히 맺히고 그로 인해 만국이 소성될 것이다. 유브라데강이 에덴동산을 흘렀던 모든 강의 중심이 되는 참 좋은생명수이다.

이 새하늘과 새땅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 사역의 일이며 예수님의 사역을 담당한 예수님의 사역자들이다. 하나님의 성경의 강은 막연하게 지리적 조건으로서만이 아니다. 네 째 강 은 네 째의 개념이 아니다. 4/4로서의 하나의 의미이다. 넷째 강 앗수르 동편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동쪽을 향해 빨리 죽으러 가는 행복의 강이다. 모세 이미지를 지닌 유프라데 강은 입으로 말씀을 전하는 이미지로서 열매를 담당한 기독교인들의 일인 서로 화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하나님의 일꾼이 있는 곳이 에덴동산이다. 따라서 온통 말씀을 전해야 하는 입의 중요성에 제시되는 곳이다. 유프라테스강 자체가 이 의미를 지닌다.

자신은 죽어지며 말씀전하는 하나님의 신부의 역할로 이스라엘 백성을 말하고 현대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신도들이다. 넷은 죽음 의미로 악이 그 위력을 떨치는 때이다. 하나님이 그의 외아들로 하여금 죄악이 한 번에 씻어지게 하신 이 곳에 대한 이해는 유브라데 강은 에덴동산에서 넷째 강 유브라데 강의 열매로 죽어야 사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이해는 1/1 2/2 3/3 4/4 5/5 6/6 7/7.....로 온전히 죽어질 때 사는 의미이다. 넷째의 이 4는 완전한 동침 즉 4/4의 개념이다. 넷째 날의 모세가 있다. 모세는 물에서 건져졌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였다.

이 또한 홍문표 문학박사이자 신학박사로서의 철저한 에덴시학자로서의 철학이다. 화합으로서만 얻어질 수 있는 순진무구의 길은 비유적으로 에덴 동산에서의 남녀의 부부사이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내야하는 사역자들 중의 하나인 홍문표는 말씀의 사역을 기억하고 녹명하는 일이다. 물론 이 기억하고 녹명하는 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의 의미이지만 성경 창세기의 날들과 같이 전체의 삶을 일곱째 날로 한 한날의미인 온 생애를 하나님을 위한 에덴 소망의 길이다.

일곱째 날은 7/7로서 한 날 즉 주의 날이 되며 구약 전체의 의미가 전하는 죽어야 산다이다. 성경은 일의 설명을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 사는 것이고 그리고 그 죄악의 정점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으로 하여 한 번에 씻어짐을 나타낸 이 단 한 길이며 그리고 그토록 열망하는 에덴시학의 길이다.

하나는 하나 ד󰖎󰔟󰕘(하에하드/하나, D.AMS/관사, 완료, 남성단수, 2:11)로 시작하여 ד󰖎󰔟(에하드/하나, D.AMS/관사, 완료, 남성단수, 2:24)오 끝난다.

홍문표 박사의 에덴 시학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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