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
맞 선
유 금 호
결혼 전, 맞선 몇 번 본 것이 자랑이라고 늘어놓는 사람을 만나면 지금도 나는 명치끝이 훅 막혀 온다.
맞선 100회 돌파니, 선을 자주 보다보니 한 여자를 다른 경로에서 또 만났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사가 되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날더러 ‘주변머리가 없다’느니, ‘천연 기념물 어쩌고..’하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
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주변머리가 없다’는 것은 머리통 주변 머리숱이 적다는 이야기일 텐데, 나는 앞이마만 해도 눈썹이 맞닿게
숱이 많은데 ‘주변머리’ 없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으며, 30 중반까지 총각이라고 ‘천연기념물’운운은 ‘크낙새’나 ‘미선나무’ 같은 진짜 천연기념물들이 안다면 얼마나 불쾌하겠는가, 말이다.
여자 사귀는 데 소질 없는 것은 어머니 말씀대로라면 내림일지도 모른다.
“늬 아부지는 나 말고 평생 다른 여자하고 말도 안 나누어 봤을 것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할 때면 흐뭇한 표정으로 이렇게 이야기하고 했는데, 내가 서른이 넘자
혀를 끌끌 차면서
“어찌 저리 주변머리도 없을꼬? 누가 지 애비 자식 아니랄까 봐, 못난 것만 닮아 가지고는...”
그러니 어머니 역시 종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버지가 평생 어머니말고는 다른 여자하고 말도 안 나누어 보았다면 나는 아버지보다는 한 수 위일 터였다.
나는 진전은 없었지만 그래도 데이트를 해 본적도 있고, 나 혼자 좋아해 본 여자도 있었다.
특별히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몇 번 만난 여자가 내게 안녕을 한건 순전히 종로 5가 리어카에서 꽃나무를 팔던 노파 탓이었다.
집 정원에 꽃이 많다던 그 아가씨에게 점수 좀 따 보려고, 그 해 이른 봄 장미나무 한 그루를 선물한 것이
꼬여 버렸던 것이다.
평소 그런 것에 눈길을 돌려 본적이 없었는데, 이 아가씨, 처음 만날 때부터 꽃 이야기를 많이 꺼냈던 터라
이른 봄, 종로 5가를 지나다 한 노파가 리어카에 여러 그루 장미 나무를 얹어 놓고 있기에 눈길을 돌린 것이
잘못이었다.
“장미 사시려구? 골라 봐요. 빨간 것, 흰 것, 노란 것, 색색으로다 다 있으니께...”
“껌정으로 피는 것도 있어요?”
‘흑장미’가 어떻고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서 던졌던 말이었다.
“아, 있고말고. 그것도 여러 가지지..”
“그래요? 그럼 제일 이쁜 검정 장미로요.”
“이쁜 것이라? 좀 비싼데... 그래도 이건 기가 막히게 이쁜거유.”
그렇게 산 장미 한 그루를 그녀에게 건냈을때, 그녀 발갛게 달아오르던 귓불과 처음 내 손을 앞서 쥐었던 그
손의 감촉이라니...
“검정 장미로 고급종이면 이름이 뭐래요? ‘본 누이’라고 그래요?’
나는 어물거리며, 글쎄, 그렇게 들은 것도 같고요. 최고로 귀한 흑장미라던데... 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두 달 후 나는 휴대폰 속에서 앙칼지게 울려오는 그녀 절교 선언을 들었던 것이다.
“흑장미? 참 웃기지도 않아. 찔레꽃 가져다주고 뭐, 최고 품종 흑장미? 뭐, ‘본 누이’?....치사해. 남자가...”
그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세상 일이 그렇지만 특히 여자와는 모든 것을 정확히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던 셈
이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 후 회사 신입 사원 면접이 있었을 때, 첫눈에 가슴이 컥 막히게 느껴지는 여자가 하나 눈에 띄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을 만큼 자그마한 몸집에 볼에 있는 보조개가 너무 인상적이
었다.
합격자 발표가 있고, 과장이 신임 여직원들을 우리 자리로 데려와 인사를 시키는 동안, 나는 그 보조개의 여자가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본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숨소리를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고개를 숙이고 어금니를 물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곳저곳 책상을 돌던 신입 여사원들이 내 앞까지 왔을 때도 나는 어금니를 앙다물고 있었다.
“앞으로 많이 부탁합니다. 저 미스 안이에요.”
바로 그 여자가 내 앞에 와 있었던 것이다.
“예?”
“저, 미스 안이에요.”
아아, 그 순간의 절망감이라니. 며칠 간 나를 그토록 혼란 속에 빠트린 상대 여자가 미스가 아니라니....그러나 나는 이런 경우 모든 것을 빨리 포기하고 체념해야 상처를 덜 받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힘
들었지만 내 마음 속에 일어났던 혼란을 혼자 수습하기 위해 혼자 못 마시는 소주를 그날 밤늦게 잠자리에서
마셔 보기도 했다.
그런데 결혼을 한 기혼자로 생각하고 애써 내 감정을 사렸던 그 여자의 청첩장을 받아들고는 하늘이 정말 노
랗게 변하는 것을 처음 느꼈다.
미스가 아닌 게 아니고, 그녀 성이 안(安)씨였던 것이다.
남녀 관계는 누구에게 털어놓기도 쑥스럽고 해결책이 생길 것도 같지 않았지만 내 충격은 너무 심했다.
그런데 그 무렵 마침 시골 어머니에게서 외가 마을에 마땅한 신부감이 있으니 ‘맞선’을 한번 보고, 어지간하면 혼인을 하라는 전갈이 왔던 것이다.
여러 가지로 심란해 있던 터라, 어머니 뜻대로 결혼을 해버리겠노라고 마음을 굳히고는 초등학교 때 친구 둘을 불러내었다.
“야, 드디어 천연 기념물 하나 사라지게 생겼네....야, 굼벵이도 뒹구는 재주 있다더니...야, 그래 한 잔 하
자.’
결혼을 일찍 해 애들이 둘씩이나 되는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은 제 일이나 된 듯 즐거워하면서 내게 술을 권
했고, 나는 술김에 ‘흑장미’사건과 ‘미스 안(安)’에 대한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두 친구는 배를 움키고 웃어대더니, 야, 너 장가가서 그래가지고 신방이나 차리겠냐?...어쩌구 하면서 조명이 좀 어두운 술집으로 나를 끌고 갔다.
원래 못 마시는 술을 두 녀석이 연거푸 권하는 바람에, 결국 얼마 안 되어 그 집 화장실에 가서 토하기부터
했는데, 웬걸 술자리에 돌아왔더니, 화장품 냄새가 풍기는 여자들 셋이 우리 자리에 끼워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 친구 딱지도 안 땐 새 총각이다. 누가 실습 좀 시켜 줘라..’
친구 하나가 떠들어대었고, 왁자한 웃음소리와 함께 유달리 코가 뭉퉁하고 큰 여자가 내 귀를 양손으로 붙잡
고는
“아이구, 귀여우셔라.”
어쩌구 하는 바람에 나는 두 손을 휘저으며, 다시 욕지기를 느껴 자리에서 튀어 일어나 버렸다.
화장품 냄새가 비위를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야, 주변머리야, 저 천연기념물... 소리를 들으면서 화장실 쪽을 찾는 내 뒤에서 내 곁에 앉았던 여자의 쇳소리 같은 앙칼진 목소리가 뒤따라 들려 왔다.
“별 희껍스러운 병신새끼도 다 있네...총각? 총각 좋아하네... 나도 내일이면 고향 가서 새 처녀 되어 맞선 볼
몸이라구. 나도 어엿하게 맞선 볼 몸이라구...웃기고 있어. 별 병태같은 게...’
그리고 뒤이어 친구 목소리가 들렸다.
“귀하신 몸은 어딜 가셔서 맞선 보시는데?...”
“왜? 사내들한테 술 따르고 몸 따른다고 고향도 없는 줄 알우?....그래. 나도 내일 모레면 서울서 잘 나가는 벤처회사 사원 사모님 후보라구요. ...고향 그래요...”
아아, 나는 그녀가 줄줄거리며 외워대는 고향 주소를 안 들었어야 되었다.
어머니가 태어난 그 작은 마을 이름까지라도 안 듣고 그 집을 나왔어야 했다.
그랬다면 훗날 나도 총각시절, 딱 한번이지만 외가 동네의 참한 색시와 맞선을 본적이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yoo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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