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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깊이의 생태환경시

- 김지향 시집 [비온 뒤 풀밭]

한 영 옥(시인·성신여대 교수)

1.
김지향 시인의 열 여섯 번째 시집 [비온 뒤 풀밭]은 그가 근년에
꾸준히 추구해온 생태환경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보다 익숙한 솜씨로
담아내고 있다. 그만큼 한 세계에 몰두해온 세월의 부피를 느끼게 해
주는 시집이었다고 사려된다. 그는 근년의 시집 [세상을 쏘다]에서의
"거구의 고름집을 실어다 부렸던 스텔라, 벤츠, 르망, 살롱으로 길이
막혀버린 <폐차장 도시>"의 비정한 이미지, <얼음장 밑으로 빠진 가슴
>에서의 "무더기로 쏟아지는 산성비를 부르는 <검은 바람>"을 통해 이
시대 위협적인 삶의 환경을 꾸준히 진단해 왔었다. [얼음장 밑으로 빠
진 가슴]의 自序에서 밝힌 대로 공해 문제에 대한 '치열한 내전'을 그
는 치뤄내고 있는 것이다.
70년대 고도 산업화시대 후로 생태 환경의 위기에 대한 심각성은
인류의 관심거리로 크게 부각되어 왔다. 그리하여 이 문제에 대한 각
별한 관심이 의식 있는 시인들에 의하여 표명되어 왔었다. 우리 시의
일각에서도 특히 젊은 시인들에 의하여 그 목소리가 높여졌다. 작년도
월간 詩誌 [현대시]의 특집 좌담 <생태환경시와 녹색운동>은 그간의
우리 문학에 있어서의 생태환경시에 대한 면모를 어느 정도 짐작케
해주는 것이었다. 이 좌담회에서는 생태학적 인식을 바탕으로 환경 문
제를 다루고 있는 시를 일반적으로 '생태환경시'라 지칭한다고 의견을
냈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이 용어의 立法이 분명한 것이 아님에 의견
을 모으고 있었다. 사실 이 좌담회의 참석자들도 각기 '환경시'가 합당
하다, '생태시'가 합당하다는 異見을 보이다가 '생태환경시'라는 용어를
그 합의점으로 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이 좌담회에서는 다음과 같
이 '생태환경시'에 대한 정의를 내려준 바 있다.

생태환경시의 개념은 인문과학적인 시각의 장점인 속성, 자연을 인간
을 위한 환경으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과 자연을 동등한 생태계의 일원으
로 생각하는 입장에 근원적인 지향점을 마련하고 구체적인 표현의 소재
나 주제에 있어서는 지금껏 진행되어온 사회환경운동의 여러 모양을 반
영하고 자연 생태계의 파괴가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모순과 깊이 연루되
어 있으므로 그것을 극복하는 관점, 또한 정치 지향적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끌어안는 시의 영역으로 정의되어야 합니다.([현대시], 1992.6)

이상의 정의에 힘입어 이제 김지향 시인의 시를 생태환경시의 영역
안에 설정시키고 이번 시집을 읽어가기로 하겠다. 그런데 생태환경시
의 개념을 좀더 튼튼히 하기 위하여서 생태학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
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생태환경시라는 용어가 어차피 생물학적 용어
의 원용이라면 그 원개념이 확실한 파악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하여 간략하게 살펴본 생물학에서의 생태계
에 대한 개념은 이러한 것이었다.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자연계에는 여러 종류의 생물 개체군이 생활
한다. 이 생물군과 더불어 비생물학적 환경이 있으며 이들 사이에는
물질순환, 에너지 유전이 일어나 한 덩어리의 거대한 조화를 형성하는
데 이 조화를 형성하는 자연계의 기능적인 기본 단위가 생태계
(ecosystem)다. 이렇게 하여 자연계에는 끊임없는 동적 변화가 일어
나는 데 이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다름 아닌 생태계의 다양한 구성인
자들이다. 이 구성인자들은 물질순환을 유도하는 무기물질, 생물과 비
생물 사이를 연계해주는 유기물질, 공기, 수분 등의 물리 요인, 녹색
식물과 같은 생산자, 동물과 같은 소비자, 그리고 곰팡이나 세균과 같
은 분해자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무기물질, 유기물질, 물리적 요인은
비생물환경에 속하고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는 생물군집에 속한다.
앞서 얘기한 대로 생태계는 조화를 유지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으며
천재지변이 없는 한 평형상태는 언제까지나 유지된다. 이것이 생태계
의 안정성이며 항존성이다. 그러나 어느 하나라도 균형을 잃으면 생태
계는 파탄을 일으킨다.(이상은 [일반생물학](강영선 외)에서 요약한
것임) 대략 이와 같은 생태계의 개념에서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자극
하는 단어는 '파탄'이라는 말이 아닐까 한다. 이 파탄의 주범이 인간이
라는 사실에서 오는 자격지심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생태계의
파탄은 곧 인류의 파탄인 것이기에 이 시대 환경문제에 대한 성찰은
바로 인간의 성찰에 다름 아닐 것이다. 따라서 생태환경시는 이 시대
의 첨예한 반성의식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자연스럽게 갖게 한다.
그러고 보면 또한 생태환경시는 참여적 성격을 띨 것이 분명하다. 생
태환경시는 이 시대의 피폐한 삶과 이 피폐성을 야기시킨 사회 구조
적인 부조리성을 들추어내고 이에 대한 반성의식을 촉구하는 사회적
목소리를 담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염려되는 하나의 문
제는 소재주의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즉, 현실이 문학을
압도해 버리는 뒤바뀜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염려다. 그러나 이는
시인의 역량 여하에 달려 있는 문제임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이제
이상의 얘기들을 기본 전제로 생태환경시라는 시선을 견지하며 [비온
뒤 풀밭]의 세계를 짚어 가기로 해본다.

2.

이 시집은 피폐한 삶의 환경과 이 환경의 피폐성에 둔감한 마비된
지각, 마비된 양심을 일깨우려는 간절함으로 가득 차 있다. 가슴, 양
심, 정직한 눈이 사라진 무감동의 시대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집은 날카로운 현실인식의 표현과
더불어 특유의 상상력에 의하여 순수한 인간성, 즉 순수의지에 대한
인간본성을 일깨워내려 애쓰고 있다. 이 시집의 저자가 인간의 본능적
인 순수의지를 현실인식이라는 구조 안에 또 하나의 층위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시의 본질에 충실하려는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시
는, 시의 언어는 근원적인 것을 환기시킬 수 있어야 하며 이것이 바로
시의 미적 기능의 하나라면 이제 우리는 김지향 시인의 이번 시집이
단순한 소재주의 차원에서 맴돌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져도 좋
겠다. 우선 이 시집의 시는 생태계 자체가 제시하는 완벽한 아름다움
그 자체에 감응하는 인간의 시선을 제시해 준다. 마치 생태환경시로서
의 序章과 같은 것으로 [비온 뒤 풀밭]의 세계가 특히 그러하다.

비온 뒤 봄 아침
풀밭이 잘 닦은 거울이 되었다.
거울이 되어 사람의 가슴도 비춘다
그러므로 풀밭에서는
사람의 속도 투명해진다

아직 아무 발자국도(시간의 발자국 말고는)
지나가지 않은 풀의 가슴에
사람가슴의 흙탕물이 퉁겨질까봐
바라보기가 미안하다
- <비온 뒤 풀밭> 부분

이 시의 소재는 제목 그대로 비온 뒤의 신선한 풀밭이다. 여기서
풀밭은 단순히 서경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풀밭은 인간의 모습
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이 거울에 비추이는 인간의 모습을 반성케 하
는 의미로까지 확장된다. 즉, 풀밭과 마주한 시의 화자는 인간에 의하
여 아름다운 자연이 훼손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드러낸다. 실제로 우
리는 아름다운 자연과 마주할 때 기쁨을 누리는 이면에서 언제나 훼
손의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경험을 갖고 있다. 이 불안감은 시인
에게 우리 시대가 파멸의 잠복기에 처해 했음을 예고하게 해준다. "지
하로 하강한 전쟁이 어설프게 지상 상승하지 못하게 쉬잇, 조심 조심
할 때다."라는 <지금은 잠복기>에서의 낮은 목소리에서 이는 충분히
읽혀진다. 이어서 시인은 지하로 잠복한 전쟁이 다시 올라오지 않기
위하여서는 우리 시대의 환경에 대한 냉정한 반성이 주어져야 함을
고발적인 목소리에 싣는다. 한편 이는 문제제기의 차원을 함께 보여주
는 것이기도 하다.

1)
발바닥에 엎드린 세균이 우글거리는 상자 속
거기서 연기처럼 기어 나오는 구정물
그게 바로 지금 세상을 뒤덮는
산성비를 만들고 있음을
그 속에
사기, 사치, 시기, 질투, 분쟁, 살인
인간의 속성들이 밑도 끝도 없이
굴러 나오고 있음을
그는 보았다.
- <점잖게 내리는 산성비> 부분

2)
가을 소풍을 망가뜨린 소나기가
여기저기서 길을 막고 마구잡이로
움직임을 짓밟는다
버스, 승용차, 폭군 트럭을 일시에
산성 물에 띄운다
정신병원에나 밀어 넣어야 할
가을 소나기

벼락이 괴성을 질러댄다
허리 굽은 유실수 가지가
툭 끊어져 열매들이 떨어진다
- <가을 소나기> 부분

위의 예는 산성비에 대한 소재를 취급한 경우다. 사실 산성비라는
소재는 시에 취급하기에 결코 쉽지 않다. 산성비가 이 세계를 파멸시
켜가고 있다는 가공할 현실을 어떻게 서정 양식 속에 담을 것인가는
확실히 곤혹스런 문제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이런 류의 작업은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앞세우는 데서 행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다. 실제로 위의 시편들은 고발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그러나 숙고해
보면 단순히 고발적인 차원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위
의 시 전편을 살펴보면 황폐해 가는 인간 삶의 여러 환경들은 쓸쓸함
과 고독을 환기시키고 이를 극복해 나가야 할 인간의 자세를 행간에
서 유추해 내게 한다. 그만큼 시인의 고발적 목소리는 여과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시적 대상에 대하여 주관적 감정을 억누르고 되도록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려는 태도, 미적 거리(aesthetic distance)를 유지하
는 데서 얻어지는 효과라 하겠다. 시의 대상과 관찰자의 거리가 이상
적인 상태로 조정되었을 경우에 우리는 흔히 미적 거리라는 말을 쓴
다. 미적 거리는 대상을 자신의 사적, 공리적 관심에서 해방시켜 대상
의 본질을 꿰뚫기 위하여 요청되는 거리다. 따라서 위의 시들이 산성
비가 내리는 현실을 고발하겠다는 공리적 관심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단순한 구호의 차원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위의 시들
이 어떻게 심미적 거리를 확보하고 있었는가에 주목해 보기로 하자.
1)의 경우 시인은 감정이 격앙될 것을 우려, 그라는 삼인칭의 시선으
로 옮아가는 동안 나의 감정은 그만큼 여과되고 따라서 차분하고 객
관적인 그리고 보편적인 목소리를 얻을 수 있다. 이 시의 전편을 읽어
보면 '그'는 다름 아닌 복사기다. 사실을 남김없이 찍어내는 복사기의
기능을 빌어 시인은 이 시대를 베껴내 그 실상을 우리에게 제시하려
는 것이다. 제목인 '점잖게 내리는 산성비'에서 느껴지는 아이러니의
수법2도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한 방법이다. 아이러니란 감정적
이기보다는 지적 전략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2)의 경우는 결실의 계절에 쏟아지는 가을 산성비의 무자비한 횡포
를 그리고 있다. 여기서서는 '망가뜨리다', '짓밟는다', '질러댄다', '떨
어진다' 등의 과격한 어감의 단어들에 의하여 산성비의 파괴적 이미지
를 대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한다. 즉, 가을날 결실을 망가뜨리며 쏟
아지는 소나기의 모습을 감정을 섞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치열한 반성
의식을 내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신병원에나 보내야 할 가을비라
는 시인의 시니시즘(Cynicism), 역시 환경 파괴의 주범인 인간 고발
을 내재화시킨 예가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위의 시를 통해 인간
의 삶이 새롭게 방향을 전환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전망을 깨닫는
다. 심각한 환경파괴의 여파가 여기저기서 목도되는 오늘날의 비참성
과 극복의 의지는 김지향 시인의 텍스트 너머에서 독자가 완성시켜야
할 몫이기도 하다. 이러한 텍스트의 체계외적 실현은 암시의 힘에 의
존한다. 이에 김지향 시인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여 시적 대상을 냉
정하게 드러냄으로써 그 암시의 힘을 충분히 발휘한다. 이러한 사실은
시인의 서문에서 언급한 대로 "내 시는 현실 인식의 바탕에서 현실을
고발하는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천진 무구했던 인간성
으로 회귀하려는 호소를 내포하고 있다. 아직은 우리에게 순수지향의
의지와 순수에 대한 귀소본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라는 사실에서도
어느 정도 짐작된다. 이상의 특질은 물론 위의 시편들에만 한정되는
방법이 아닌, 그의 시 전체에서 귀납되는 것임을 밝힌다.

3.

김지향 시인의 시가 단순히 현실 고발의 차원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은 풍부한 상상력을 통하여 새 지평을 열어준다는 데서 다시 확
인된다. 이는 특히 계시록적인 이미지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
수법에 의하여 그가 보여주는 미래 암시의 섬뜩함은 보다 강력한 설
득력을 얻어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뼈만 남은 나무>, <가을, 생
의 모반>, <잘려나가는 어둠>, <그때 그곳>, <이상한 마을> 등에서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1)
나무들은 잎과 살을 베어
차량들의 연통 입을 틀어막았다.
- <뼈만 남은 나무> 부분

2)
대장간에서 오래오래 벼리어 달궈진
비수가 휘영청 마지막 넘어가는
석양에 피칠을 하고 그리고
적의같은 대책없는 어둠을
푸드득 내리쳤다.
(질투, 시기, 분쟁이 뒤섞인 어둠의 언어들을)
- <잘려나가는 어둠>
3)
핵진에 그을려 새까만
발이 부챗살로 치뻗는 발가락 사이로
핵먼지를 뿌리며 굴뚝 위에서 춤추는
바람발이 보인다
- <공기 밖의 풍경> 부분

1)의 경우는 매연을 일방적으로 쏘아댄 차의 연통을 나무들이 그의
잎과 살로 틀어막고 뼈만 앙상히 남은 모습, 2)는 이 시대의 어둠을
대변하는 오욕스런 언어들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 3)은 핵진으로
뒤덮인 세상의 괴기한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모두가 시인의 상상력
에 의한 형상화이면서 머지않아 현실로 다가올 풍경들이다. 이 풍경들
은 지구의 비극적 종말, 그 처참한 모습들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섬뜩
한 이미지 너머에 시인의 의도가 암시적으로 스며 있음을 우리는 안
다. 이와 같은 간접화의 방법은 시의 미학을 견지하면서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게 한다. 여기서 계시록적 이미지가 보다 구체화된 예
를 하나 더 보면서 이 방법의 의의를 확인해 보자. 인용하려는 작품은
<이상한 마을>이다. 내용이 긴 관계로 3연과 5연만을 보기로 한다.

거미줄로 얽힌 안개를 걷어 내고
숨을 죽인 내 발자국이 놓일 때마다
으스스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한 구석에 나둥그러진 그네 위엔
다 망가진 해골이 자불다 깨어 나고
해골의 주인들은 핏자국이 번진 셔츠로
마당에 나와 탈춤놀이를 하고 있었다. (3연)

모가지를 비틀리며
이름 없는 일년생 풀꽃들은
한바탕 탈춤이 벌어질 때마다
쥐어진 머리채를 흔들어댔다
이빨 사이로 뚝뚝 피를 흘리며
삶을, 나라를, 정치를, 욕망을, 미래를
이빨에 끼우고 와작와작 씹을수록
터져 나오는 일그러진 웃음을
마당에 깔면서 춤을 추는 탈춤패의
헛웃음을 받아먹고 배를 채운
일년생 풀꽃들의 허기를
나는 분명히 만져볼 수 있었다. (5연)

제목 그대로 이상한 마을의 풍경이다. 이상하면서도 무서운 마을의
풍경이다. 해골이 탈춤을 추고 모가지가 비틀린 일년생 풀꽃들의 허기
가 분명히 만져지는 세계, 머지않아 인류가 직면해야 할 세계인 것이
다. 이 세계는 생태계의 안정성과 항존성이 무참히 깨어진, 생명이 사
그라져 가는 세계다. 이 생태계의 대형 소비자인 인간의 욕망이 극에
달하여 더는 조화로운 삶을 꾀해갈 수 없는 지경 - 다름 아닌 지옥의
이미지가 이 시를 구조해내고 있다. 이 고통스런 지옥을 면하기 위하
여 인간의 삶은 어떻게 방향을 조정해야 하는가 하는 우회적 질문을
이 시는 또한 품고 있다.

4.

이 시집은 인간의 삶이 어떻게 영위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품은
질문을 제시하는 반면, 그 해답을 구체화시킨 작품을 보여주기도 한
다. 그러니까 이 시집에서의 각 시편들은 서로 대화적인 관계를 형성,
시집 전체가 하나의 통합된 텍스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시인의 이 시집에서 제시하는 생태계 회복의 대책은 바로 사랑과 꿈
이다. 따라서 사랑과 꿈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스스로 이 시집이 제기
한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셈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끼리의 적대감,
불안감, 갈등의 여파가 욕망을 빚어내고 이 욕망은 생태계의 파멸로
이어져 산성비를 내리게 하고, 해의 눈꺼풀을 충혈 시키고, 위하수증
을 앓게 하고, 나뭇잎까지 까칠한 신경을 곤두세우게 한다. 이럴진대
시급한 일은 오직 인간의 반성을 촉구하는 일 뿐이다. 반성적 인식으
로 다시 본연의 순수의지를 회복하는 일 뿐인 것이다. 여기서 순수성
을 회복하는 일은 사랑과 꿈을 갖는 것이라고 시인은 암시한다. 하여
"부드러운 사랑의 살, 깨끗한 사랑의 봄이 불타지 않은 채 얼어붙었
다."는 '얼어붙은 사랑'으로 이 시대의 빙하기를 진단하면서 시인은 '사
랑의 무기개발'을 역설한다.

그러므로 무장을 해제하고
사랑을 가져와야 해
마음을 열어 젖히고
속깊히 들앉은 어둠의 얼굴을
그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불태울 사랑이 있어야 해
마음 문을 열 사랑의 무기개발
바로 그것, 오늘 우리의 논제는
아암, 그렇고말고.
- <사랑의 무기개발> 부분

이기심으로 무장되고 경직된 인간들이 다시금 본연의 순수함을 되
찾기 위하여 사랑이라는 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주제가 대화체의 문
장을 통하여 표현, 직접 이야기를 건네 받는 듯한 인상을 풍겨준다.
사랑이라는 내용이 대화체의 부드러운 어투와 잘 조화된 시라 하겠다.
이 사랑과 더불어 꿈, 또한 인간의 순수를 되찾는 중요한 방법이 됨은
앞서 얘기한 바와 같다.

꿈이 나를 사랑하는지
내가 꿈을 사랑하는지
확실치 않은 관계 속에서
우리는 자주 합동이 된다.
산아래 흘러내린
치맛자락 같은 논두렁길을 따라
풀밭 속을 간다.
내 꿈과 손을 잡고
땅도 안 보이는 풀 속에서 보는
천지만상은 푸르고 넓기만 하다.
풀밭은 내 맨 발을 받아주려고
미리 매끄러운 융단을 깔아 놓았구나
- <꿈과 합동이 되어> 부분

시인이 걸어 들어간 꿈의 세계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꿈과 인간
이 합동이 되는 세계는 자기 동일성이 실현되는 세계다. 따라서 그 어
느 것에게도 나의 마음을 갈등 없이 실을 수 있는, 본래의 인간성이
회복되어 있는 바로 그 세계인 것이다. 시인이 꿈속에서 경험한 그 세
계는 사실 애초에는 꿈이 아닌 인간 본연의 현실이었다. 아름다운 인
간 본래의 고향을 꿈 속으로 퇴각시킨 장본인은 물론 인간이다. 이제
그 꿈을 현실 위로 짊어지고 나와야 한다. 인간은, 그 중에서도 시인
은 더욱 더.

5.

이상 [비온 뒤 풀밭]의 세계를 살펴보았다. 얘기해온 대로 이 시집
은 생태환경시의 영역에서 해명하기에 합당하였다. 이 합당성은 1)의
생태환경시에 대한 용어 정립, 2)의 환경고발과 객관적 거리의 확보,
3)의 계시적 이미지에 의한 메시지의 강렬성, 4)의 사랑과 꿈에 의한
순수성의 회복을 전개해 오는 동안 다시금 확인될 수 있었다. 이와 더
불어 발견된 또 하나의 특징은 각 작품들이 개별적인 독립성을 유지
하면서도 환경 고발과 문제 제기, 계시록적 이미지에 의한 강렬한 메
시지, 그리고 문제 해결의 대안으로써 사랑과 꿈에 이르기까지를 대화
적 양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즉, 시집 전체가 하나의 텍스트로
다시 구조화되는 입체적 전략을 꾀하고 있었다. 이는 시인의 한 주제
에 대한 끈질긴 집념, 그리고 주제를 부각시킬 수 있는 다양한 미적의
장을 터득하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리하여 이 시집은 생
태환경시가 빠질 위험, 소재주의를 극복하는 쾌거를 우리에게 보여주
는 것이다.
이 땅의 비중 있는 여성 시인에 의하여 지금 인류의 가장 비상한
관심거리인 환경 문제가 끈질기게 다뤄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주목
을 요한다. 이는 이 시인의 첨예한 사회인식과 사회 선도의 역할이 돋
보임과 더불어 환경공해의 심각성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반성
적 사고를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태환경시라는 이 시대의 새로운 장르와 더불어 김지향 시인의
[비온 뒤 풀밭]의 세계가 귀중한 예로 자리매김될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