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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재롱/정성수(丁成秀)
2012-03-27 11:22:25
chungpoet

조회:1024
추천:90

<단편소설>

아내의 재롱

정 성 수(丁成秀)

 

 그러고보니 세상에, 내 나이가 벌써 서른 셋이라니!  10대도 아니고 20대도 아니고 30대라니!  아아 끔찍해라....... ! 갑자기 등뒤에서 나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그 흉칙스러운 손길을 뻗어와 슬그머니 은밀한 곳을 더듬는 것 같아서 한순간 소름이 끼쳤다.

 은혜는 황급히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곤 조금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쟁반 위에 내려놓았다.  커피 맛이 왜 이리 쓰기만 하지?  이젠 커피 향기마저 늙어 버렸남?  30대라는 중년의 느낌에서 한 술 더 떠서 아예 마귀할멈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물어물 사는 사이에 꽃다운 내 청춘은 이미 서산쪽으로 져버렸어.  난 이제 온몸에서 향기가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라, 한심하게도 추한 여자로 변신하는 중이야.

 추한 여자라니?  아니, 내가 추한 여자가 되다니?  세상에, 말도 안 돼!  은혜는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소파 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눈이 갑자기 번쩍거렸다.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하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렇게 흥분하지?  그녀는 빨려들기라도 하듯이 벽쪽으로 다가갔다.  기다란 거울이 눈을 부릎뜬 채 그녀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은혜는 거울 앞에 서서 결투하도 하려는 듯한 자세로 거울 속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이게 누구지?  아니, 이게 나란 말야?  얼굴이 갸름하게 생긴 웬 낯선 여자 하나가 불만과 초조가 뒤섞인 표정을 띈 채 말없이 은혜를 지켜보고 있었다.  은혜는 좀더 가까이 거울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길게 헝클어진 머리카락, 총기가 사라진 눈, 일그러진 입술, 환자처럼 창백한 얼굴....... 이 여자가 김은혜?  이 여자가 진짜 나라구?  정말 나야?

 이것이 도대체 어찌 된 노릇인지, 정색을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거울 속의 여자는 표정이 더욱 굳어지면서 점점 더 낯설어 보이는 게 아닌가.  이 여자가 내가 아니라면 그럼 진짜 나는 어디 있지?  진짜 나는 어디론가 숨어 버렸나?

 아아....... 갑자기 야릇한 외로움이 가슴을 쳤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돌아섰다.  더 이상 거울 속의 얼굴을 쳐다보기가 싫었다.  저렇게 멍청해 보이고, 저렇게 매력이 없어 보이고, 저렇게 자신 없어 보이는 여자가 나일 리가 없지.  저건 딴 여자야.

 그녀는 뿌리라도 내린 듯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거울쪽으로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화장도 하지 않은 거울 속의 여자는 여전히 낯설고 나이보다 늙어 보였다.  은혜는 거울 속을 노려보았다.

 "블쌍한 년......."

 문득 두 눈동자에 모아졌던 힘이 풀어졌다.  거울 속의 여자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입가로 피식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자, 웃어. 이년아, 재롱떨지 말고 웃자.

 은혜는 다시 소파로 돌아와서 남아있는 커피를 마셨다.  거실 창문쪽에 놓인 열두 개의 화분 중 아홉 개의 화분 위에서 아프리칸 바이올렛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보라, 연분홍, 자주색 등 형형색색의 꽃잎들....... 천장쪽 허공에는 보스턴과 러브체인 화분이 매달려 있고, 거실 구석쪽으로는 달개비, 신비디움 등이 그 싱싱한 잎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베란다 위에는 크고 작은 여러 종류의 선인장들과 몇 그루의 소철, 군자란, 괭이밥, 문주란, 베고니아 등 수많은 화분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래?  내가 저 화초들보다도 못하단 말야?  저까짓 풀보다도?

 남편은 요즈음 화초들이 뿜어내는 꽃송이에는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은혜에게는 감탄과 찬사는커녕 아예 눈길조차 제대로 보내주지 않는 것이었다.

 아아, 속상해.  그래, 서른세 살이 뭐가 많다는 거야?  이제 겨우 20대를 갓넘었을 뿐인데.......아직도 난 시퍼런 청춘인데, 그런데 낭군이란 사나이가 꽃 같은 아내를 거들떠보지도 않아?  자긴 뭐가 젊다구?  나보다 다섯 살이나 더 먹었으면서 날 마귀할멈 취급을 해?

 되씹을수록 독이 올라서 온몸이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세상에, 내 자존심을 이렇게 망가뜨리다니?  잠시 후, 그녀는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그런데 가만 있자.  가만 있어 봐.  내가 왜 이렇게 추하게 놀지?  은혜야, 좀 유치하지 않니?  내가 무슨 색녀도 아닌데, 내가 그렇게 야한 여자도 못 되는데, 사내 내음새에 광기가 든 여자도 아닌데,......내가 왜 이렇게 안달을 하면서 웃기지?

 그런데, 그런데 말야.  웃기는 것은 웃기는 것이고 왜 이렇게 쓸쓸하지?  허망하지?  시장기가 들지?  아아, 모르겠다.  내가 진짜로 추하게 늙는 모양이다.  오- 하느님!

 은혜는 베란다쪽으로 멍하니 시선을 돌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불쌍한 은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딸 하나, 아들하나 낳고는 어느 새 폐물이 되다니? ......그래, 참으로 희안한 일이야.  불가사의하고 신기한 일일 수밖에 없어.

 내가 어느 날 이 세상에 소리쳐 울면서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났다는 것은.  수많은 생물들 중에서 두 발로 땅을 딛고 사는 <사람의 딸>로 태어났다는 것은.  하고 많은 별 중에서 이 지구라는 이름의 떠돌이별 위에 태어났다는 것도, 그래, 확실히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지.

 그리고 이 귀여운 지구는 정말 신비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별이야.  이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 이처럼 아름다운 빛이 존재하다니!  이 별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름의 독재자들, 이 독재자들은 참으로 귀여운 문제아들이지.

 가장 선량하면서 가장 악랄하고, 가장 순수한가 하면 가장 교활한 두 얼굴의 번민하는 짐승들.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들.  가장 무겁고 가장 가벼운 희극배우들.

 언제나 절망적이면서 또한 언제나 희망적인, 그러나 평화 만들기에는 언제나 서툰 아마추어들.  그 수많은 재롱 덩어리들 속에서 아직도 나는 사람의 자격으로 무사히 숨을 쉬고 있다!

 그래, 난 적어도 사람의 이름으로 살아있는 거야, 사람의 이름으로!  사람의 이름으로 날 이 별나라에 내려보낸 것은 신일까?  아니면 저 캄캄한 우주의 어느 작고 아름다운 별, 신들의 마을에 사는 지구 담당 출산과 직원의 소행?

 신들의 마을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지만 우리는 다만 마음으로 보고, 느끼고, 들을 뿐.  다행히 아직 그 누구도 신의 마을에 다녀오지는 못했다!

 만약에 인간들이 신의 마을로 가는 길을 안다면 아마도 그들은 당장 핵무기라도 싣고 달려가서 신의 마을조차 점령하려고 할 것이다.  내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보름달이 휘엉청 내리비추는 어느 이른 봄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을 저질렀다는 사실 뿐이야.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달빛의 유혹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영원히 잉태되지 않았을지도 몰라.  영원히, 그래, 아주 영원히.......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기억날 리가 없지.)  그 순간 나는 수억의 경쟁자들과 함께 내 생애 처음으로 숨가쁘게 달렸을 거야. 

 가늘고 귀여운 꼬리를 흔들면서 좁고 어두운 동굴 속을 지나, 마침내 그 동안 내가 살아 숨쉬던 아버지의 육신을 떠나서 낯선 어머니의 육신 속으로 내 알몸을 내던졌을 거야.  부드럽고 뜨거운 어머니의 자궁. 아아, 나는 수억의 정자들 중에서 제일 먼저 난자를 끌어안은 거야.

 그것은 운명이었지. 그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렸을까.  아마도 새로운 세계가 그리웠을 거야.  내 최초의 탈출. 그러나 나는 다시 어둠 속에 갇히고, 그 후 엄청나게 자라서 드디어 어머니의 감옥에서 석방되었지.

 비 내리는 겨울 새벽, 마침내 나는 새로운 인간의 자격으로 지구 위로 내려온 거야.  새로운 인간. 그래, 나는 새로운 인간이야.  그 때 나는 어머니라는 이름의 우주선 문을 열고 나와, 온 세상에 내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모아서 큰소리로 울어댔지.

 아직 말을 모를 때니까, 말 대신 울음소리로 내 존재의 탄생을 알려준 거야.  당당하게, 아아, 그때는 누구나 다 당당하지.  그리고 모두가 평등하고....... 모든 인간이 똑같이 당당하고, 똑같이 평등한 시간, 최초의 자유를 만끽하는 가장 행복한 순간, 누구나 다 왕자이고 누구나 다 공주인 시간,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가능성의 한때.......나는 인간의 후예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었어.

 난 운명으로부터 선택받은 갓난 여자였어.  인간은 위대하니까, 나 또한 위대해......온몸에서 서서히 힘이 솟구쳐오르는 것만 같았다.  은혜는 모처럼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숙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려면 아직 몇 시간은 더 있어야 하고, 찬민이는 옆집 아이들과 놀다가 오겠다고 나간 뒤 아직 소식이 없다.  은혜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욕실로 뛰어 들어가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로 온몸의 살을 적시고 손바닥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손으로 전해오는 탄력이 감미로웠다.

 아직은, 그래, 아직은 젊고 싱싱해.  난 황홀한 지느러미를 지닌 물고기야.  온몸에 흰 거품이 일도록 비누칠을 하고 샤워기로 물을 뿜었다. 거울 앞에 선 그녀의 알몸에서 물씬물씬 살향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 나는 향기나는 물고기야.  은혜는 <콰이강의 다리> 주제가를 낮게 휘파람으로 불었다.  그녀는 알몸을 번쩍이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속옷을 갈아입고 청바지 위에 물방울무늬 블라우스를 걸쳤다.

 조금 뒤 그녀는 길 건너 약국 앞에 있는 <헤어아트>집에 가서 긴 머리를 싹둑 잘라 버렸다.  남편이 긴 머리를 좋아해서 그녀의 머리는 언제나 길게 어깨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잘랐다.  긴 머리를 짧게 자르니까, 거울 속에 숨어있는 얼굴이 전보다 더 앳되고 예뻐 보이는 것 같아서 은혜는 머리를 손질하고 있는 미용사에게 농담을 던졌다.

 "어때 미스 주. 이만하면 이제 시집가도 되겠지?"

 그러자 노처녀 미용사 주양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럼요. 꼭 노처녀 같은데요.  서너번은 더 가도 되겠어요.  노처녀가 먼저 시집간 뒤에......"

 "미쓰 주가 먼저 시집간 뒤에?"

 두 여자가 함께 허공에 웃음소리를 날려 보내자, 주인 여자와 다른 손님들도 이 세상은 너무너무 재미가 있어서 웃지 않고는 도저히 못 배기겠다는 듯 덩달아서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어쩐지 비어있는 것 같았다.  은혜는 자신의 입가에 매달린 웃음의 꼬리를 단숨에 잘라 버렸다.  나 혼자 웃으려고 그랬는데, 왜 모두들 끼어들어서 낄낄대지?

 은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이미 다른 여자들의 얼굴에서도 어느샌가 웃음기는 사라졌고, 웃음기가 가신 얼굴마다 "요즈음 난 외로워요. 난 지금 늙고 있나 봐요."라는 글귀가 쓸쓸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집앞의 공터에서 고만고만한 이웃집 또래들과 어울려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찬민이가 집으로 돌아오는 은혜를 보고 소리쳤다.

 "엄마, 어디 갔다 와?"

 "응, 미장원에....."

 "머리 잘랐어?"

 "그래, 머리 잘랐다.  엄마, 이쁘니?"

 "응, 이뻐.  나, 배 안 고파.  조금만 더 놀다 들어갈게."

 "그래. 그 럼, 조금 더 놀다가 누나 오면 같이 점심 먹자아.  엄마가 맛있는 거 해 주께."

 찬민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귀여운 것.  갑자기 아이를 하나 더 낳고 싶어졌다.  찬민이의 오른쪽 뺨에 흙이 묻어 있고, 두 손은 아예 흙투성이이고, 바지에도 여기저기 흙이 묻어 있었다.  장난감차나 장난감총도 흙범벅이 되어 있었다.

 함께 놀고 있는 이웃집 영순이나 문욱이,돈성이, 유리 등 다른 집 아이들도 조금씩 흙이 묻어 있었지만 찬민이의 옷이 가장 많이 더럽혀져 있었다.

 은혜는 찬민에게 손을 흔들어 주곤 집안으로 들어섰다.  집안을 돌면서 가구의 위치도 이리저리 바꿔놓고 거실과 안방에 놓인 수족관의 물도 갈아넣었다. 그 림이나 글씨의 액자도 바꿔 달았다.

 "다녀 왔습니다아!"

 머리를 양쪽으로 땋서 묶은 숙이가 현관문을 열고 나풀나풀 걸어 들어왔다.  들어오면서부터 속사포다.

 "엄마, 머리 잘랐잖아?  긴 머리가 더 이쁜데, 왜 잘랐어?"

 은혜에게는 숙이가 딸 겸 시어머니였다.  거울의 먼지를 닦아내면서 은혜는 대답했다.

 "여름이니까. 여름은 더우니까....정말 안 이쁘니?"

 그러자 숙이는 심각한 낯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애들같애."

 "애들같다구?  그래, 엄만 숙이처럼 다시 어린이가 되고 싶은 걸."

 "머리만 짧게 자르면 애가 되나, 뭐?"

 "그러엄!  마음까지 어린이처럼 맑아지구."

 "피이-.  엄만 아빠한테 이쁘게 보일려구 그러지?  근데, 아빤 긴 머릴 좋아하잖아."

 "요샌 아빠가 짧은 머리두 좋아한대."

 "정말이야?"

 숙이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혜를 바라봤다.  거짓말이다, 요것아.  은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숙아, 점심 뭐 먹을까?  카레라이스 해 줄까?"

 "카레라이스?  응, 카레라이스 해 줘."

 "공터에서 찬민이 못 봤니?"

 "봤는데, 들어가자니까, 안 들어온대.  지금 나쁜 나라가 쳐들어와서 싸워야 한 대!"

 지난 밤보다 조금 더 늦은 시각에 초인종 소리가 거실 안에 울려 퍼졌다.  책을 읽고 있던 은혜는 깜짝 놀라 소파 위에서 퉁겨오르듯 일어섰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초인종 소리인데도 새삼스럽게 놀라기는..... 은혜는 괜히 속이 상하고 약이 올랐다.

 늘 하던 버릇대로 벽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벽시계는 이미 자정을 넘어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은혜는 인터폰 수화기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치밀어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침착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세요?"

 "나야, 나."

 남편의 목소리가 촉촉히 술에 젖어 있었다.

 "나가 누구시죠?"

 "아, 나라니까!"

 "나라면 혹시 박현만씬가요?"

 "아니, 이놈의 마누라가......그래, 나 박현만이야.  늦어서 미안해."

 "아, 네.  난 또 지나가는 술주정뱅이가 장난하는 줄 알고......."

 그제서야 은혜는 스윗치를 눌렀다.  남편은 양복 웃저고리를 벗어서 어깨에 걸친 채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다리가 조금씩 휘청거리고 있었다.  독한 술냄새가 은혜의 얼굴을 치잉칭 휘감았다.

 "오늘은 소주 마셨어요?"

 은혜는 남편의 웃저고리를 받아서 옷걸이에 걸었다.

 "아니, 위스키!"

 "위스키요?  소주보다 더 독한 술을 마셨어요?"

 "응, 별로 독하지도 않아......가만있자, 이거 뭐가 좀 변했잖아!"

 남편은 무슨 낌새를 눈치챘는지, 초첨이 흐리던 눈이 갑자기 한순간 이리저리 번쩍거렸다

 . "아니, 머리도 자르고 집안 분위기도 바뀌고...... 이 향수 냄새!  그리고 가만있자.  이건 못 보던 가운인데.  이거 혹시 옛날에 클레오파트라가 입었던 가운 아냐?  야, 이것 봐라.  마누라가 화장도 했잖아!  햐. 이거, 우리 집에 혁명 일어났네."

 남편 박현만은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듯 그 특유의 과장된 목소리로 계속해서 탄성을 질렀다.

 "좀 목소리를 낮춰요. 우리집 천사들 깨겠어요!"

 은혜가 낯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두 천사는 이미 몇 시간 전부터 각자 자기 방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 천사들이 깨면 어때?  나하구 같이 감동하면 되지."

 "당신은 안 천사잖아요."

 "안 천사?  내가 천사가 아니라니!  천사 아빠가 천사가 아니면, 그럼, 악마 아빠가 천사란 말야?" 현만은 와이셔츠와 바지를 벗어 던지곤 속옷만 걸친 채 욕실에 들어가서 찬물로 몸을 헹구고 나왔다.

 술기운이 조금은 사그러드는 것 같았다.  촉광이 낮은 전등불 아래 은혜가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 있었다. 그  옆에 현만도 함께 누웠다.

 "미안해, 마누라.  요즈음 내가 너무 고상해졌나?  플라토닉 러브의 대부처럼 말야."

 "그것도 괜찮죠.  당신은 원래 고상하니까.  한평생 플라토닉 러브도 근사해요.  아내는 잊어버리고, 플라토닉 러브는 딴 여자하구 하고, 종합적인 사랑은 또 다른 여자와....."

 "어허, 이 사람. 무슨 소릴...미안해, 미안하다구.  우리, 천사 하나 더 낳을까?"

 오랜만에 두 사람의 온몸이 웃기 시작했다.

 

 

- 1990년 서울 자양1동에서

 

 

*블로그

http://kr.blog.yahoo.com/solchi20012001 (시인의 사랑)

http://blog.naver.com/chungpoet (시인의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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