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구, 이 벼엉신…
최용현(수필가)
군대 갔다 와서 복학한지 1년쯤 지났을 무렵, 초등학교 동기회를 한다며 꼭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여자동기 재희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13년이나 지났지만, 재희 땜에 동기회에는 도저히 못 나갈 것 같았다. 재희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앞이 캄캄해진다.
100명 남짓 되는 우리 동기생들은 초등학교 6년 내내 남자 1반, 여자 2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남녀가 같은 반에 편성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간혹 담임선생님이 안 왔을 때 합반수업을 한 적은 있었다. 보통, 합반수업을 하면 남자반장이 앞에 나가서 설치는 게 보통인데, 우리 동기는 여자반장인 재희가 설쳤다.
6학년 때, 재희가 앞에서 ‘야! 거기 조용히 해!’ 한 마디 하면 우리 남학생들은 모두 찍 소리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재희는 키가 컸고 얼굴도 촌애답지 않게 상당히 예쁜 데다 공부 또한 또래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잘 했다. 그것은 이듬해 입시에서 밀양여중에 1등한 것으로 입증이 되었다.
일곱 살에 입학한 나는 부산에 있는 OO중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다시 6학년에 다니다가 1년 후배들과 함께 밀양중학교에 들어갔다. 중학교 때, 남학생들은 대부분 자전거를 타고 다녔지만, 여학생들은 대부분 등교 때만 버스를 탔고, 하교 때는 차비를 아끼려고 20리쯤 되는 신작로를 걸어가곤 했다. 더러는 지름길을 택해 논둑길로 걸어가기도 했다.
우리 동네와 중학교가 있는 읍내의 중간쯤에 동네이름을 따서 춘기다리라고 부르던 조그만 다리가 하나 있었다. 아침에는 바쁘니까 그냥 통과했지만, 하교 때는 그 다리에서 잠깐씩 쉬곤 했다. 다리 난간에 자전거를 기대놓고 볼일(?)도 보고, 어떤 때는 다리 밑에 둘러앉아 장난치고 놀거나 단체로 본 영화 장면을 재연하기도 했다.
2학년 초가을쯤, 친구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 소변이 몹시 마려웠는데 다리까지 가려고 꾹 참았다. 맨 먼저 춘기다리에 도착한 나는 난간에 자전거를 기대놓자마자 바지 단추를 열고 참았던 소변을 다리 아래로 발사했다.
시원하게 소변줄기를 뿜으며 고개를 드는 순간, 아뿔싸! 밀양여중 교복을 입은 두 여학생이 바로 앞에서 논둑길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명은 초교 동기인 재희, 또 한 명은 1년 후배 순옥이였다. 나를 알아본 두 여학생도 걸음을 멈추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후다닥 바지를 수습하고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있는 힘을 다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아, 이 일을 어찌할꼬. 후배 순옥이는 제쳐놓는다 치더라도 앞으로 재희의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날부터 나는 등교 때나 하교 때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둘만 보이면 무조건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고 지나갔다.
더 이상 재희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민하던 나는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며 아버지에게 읍내에 하숙을 시켜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 초교 출신인 선생님 댁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고, 재희와 같은 동네에 사는 용재선배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초교 1년 선배인 그도 중학입시에 떨어져 재수를 하는 바람에 우리 동기들과 함께 밀양중 3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읍에서 하숙을 한지 한 달쯤 지났을까? 용재선배가 20원을 주면서 라멩(?)을 사오라고 했다. 그때 주황색 봉지의 18원짜리 ‘삼양라면’을 처음 보았다. 조그만 물주전자에 쪼글쪼글한 면 덩어리와 스프를 넣고 우리 방 연탄불에 올려놓고 좀 있으니 보글보글 끓었다. 용재선배가 주전자 뚜껑에 익은 면발을 조금 덜어주었는데, 그 황홀한 맛에 뿅 가서 뚜껑에 붙은 낱가락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떼어 먹었다.
어느 날 밤, 하숙집 마당에서 ‘용재야!’ 하고 부르는 여자의 음성이 들렸는데, 분명히 재희의 목소리였다. 그러면 용재선배가 나갔다가 한참 있다가 들어오곤 했다. 어떤 때는 나갔다가 밤늦게 들어오기도 했다. 아,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고교입시를 앞두고 있던 재희도 우리 하숙집 부근에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던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내가 용재선배와 같은 방을 쓰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 텐데 재희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늘 용재선배의 이름을 불렀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이웃에서 친구처럼 함께 자랐기 때문이리라. 나는 재희의 목소리가 들리면 괜히 졸아들었고, 혹시 재희가 우리 방 미닫이문을 열면 어쩌나 싶어 온몸이 오그라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기어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문밖에서 ‘용재야!’ 하는 재희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마침 그때 용재선배가 방에 없었다. 당연히 내가 방문을 열고 ‘지금 용재선배가 없다.’고 해야 하는데, 문을 열거나 대답을 하기는커녕 방안에서 숨죽인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때, ‘원식아!’ 하는 재희의 목소리와 함께 우리 방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 순간 나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모기소리 만하게 ‘예-’ 하고 대답했다. 재희가 ‘동기인데 말 놓지 뭐’했다. 나는 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 하고 대답했다(어이구, 이 벼엉신…). 그러자, 재희도 민망했는지 방문을 닫고 가버렸다.
그 희한한 면담이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재희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후 재희는 마산에 있는 간호고등학교로 진학했다는 얘기를 누군가로부터 들었고, 나는 1년 후에 부산으로 진학했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마주칠 일은 없었다. 듣자하니 재희는 얼마 전에 재미동포와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 이번 동기회는 재희의 귀국날짜에 맞춘 거란다.
아, 동기회에 나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 모두 어엿한 성인이 되었고 다른 친구들도 보고 싶은데, 재희와 마주칠 것을 생각하면 도무지 동창회에 나갈 자신이 없으니 도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며칠간 고민하다가 드디어 결심을 했다. 동기회에 나가서 재희를 만나면 내가 먼저 말을 걸어 선수(先手)를 치겠다고.
“야 이 가시나야, 알고 있었니? 니가 그때 우리 하숙집에서 ‘원식아!’ 하고 불렀을 때, 내가 또 니 앞에서 오줌 쌀 뻔했던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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