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방송(DSB) 문인글방

교하객담(交河客談)

1.교하에서 촌놈으로 살기

이제 촌사람 다 되겠구나. 검은 피부에다 남보다 잘 생기지도 못한 얼굴이 꺼멓게

타서 꾀죄죄한 촌놈으로 살 수 밖에 없겠구나. 이사 오기 전, 그럭저럭 서울 시민으로

40년을 살아 왔는데 이를 어쩌나 싶어 조금은 심란하였다. 교하에 산지 3년차, 모든 것이

처음에 그렸던 인상과는 딴판이어서 촌사람으로 잘 적응하고 산다. 주변의 정취가

차분하게 정겨워지고, 신도시 다웁게 잘 기획된 찻길이며 잔 손길 정성들인 조경사업도

의도적으로 산뜻하다. 황해도나 평안도 어디쯤에서 불어옴직한 바람은 맑고 시원하다.

왕복 한 시간 코스의 중앙공원은 숲속길마을 앞을 병풍처럼 펼치고 있어 마을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고, 터널 같은 숲속길을 걷는 기분이 곰살갑게 은근하다. 참나무,

잣나무, 소나무, 산벗나무, 밤나무들 서 있는 자태도, 제 가지의 잎들을 거느리는 꼴태도,

보면 볼수록 더욱 신선하고 지겨워 지지도 않는다. 조석으로 한들거린 나뭇잎도,

무심한 잡초의 꾸밈없는 몸짓도 한결같질 않고, 볼 때마다 별스럽기 그지없다. 오관의

감각기관을 모두 자극하는 듯 입체적으로 맛깔스럽다. 아침의 나무는 기지개를 쭈욱

켜는 듯 위로 옆으로 시원스럽게 내어뻗는 모습이고, 저녁의 잎새들은 잠자리에 들어서는

피곤한 사람마냥 찡그린 표정으로 추욱 쳐져 있곤 하는 것이다.

아파트 11층에서 멀리 내다뵈는 문발 들녘은 살아온 세월만큼의 길이로, 깊이로, 넓이로,

아픔으로 밀려왔다가 쓸려가곤 한다. 금방이라도 첨벙 뛰어내려 성큼 안기고 싶은 은근한

유혹에 빠져든다. 확 트인 들판은 철따라 바람따라 어느덧 문득, 제 모습을 변화시키는

신통력도 보여주고, 으스러지게 끌어안아 물어뜯고 싶은, 환장하게 보고 싶은 유년의

배꼽도 거기에 있을 것만 같은 들녘. 굽이굽이 너울진 논길이 꾸룩 꾸루룩, 산비둘기

울움 같은 음률로 어두운 내장 속을 스멀스멀 비비고 들어오기도 하는 것이다.

40년을 살아온 불광동집은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길에다 답답하게 이어진 집들로 꽉 닫힌

문짝처럼 앞, 옆, 뒷집만 대하고 살아왔다. 그때 그 시절은 강요된 회상(回想)처럼 피하고

싶은 추억으로, 운명같이 견고하게 막아서는 것이다. 시간을 60년쯤 뒤로 돌려놓고 아파트

서재에서 해지는 들판을 내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동지(冬至) 지난후로 낮 시간이 일분

정도씩 길어져서 망종, 단오께는 저녁 7 시 40분이 지나도록 해가 떨어지지 않는다. 해가

지는 김포 쪽은 발밑으로 드멀리 보이고, 붉어진 해가 능선에 걸렸다가 꼴깍 지기까지는

일분이 채 안 걸린다. 붉은 피를 머금고 추락하는 석양은 슬프다. 눈부신 아침 해로 다시

뜨겠지만 두 번이 없는 삶은 덧없이 허망할 뿐. 그래서 사람들은 우는가 보다. 지구는

돌고 돌아, 해는 지고 뜨고, 햇볕은 내려내려 쌓여가고, 무한 막막 허공에 던져진 육신은

현기증이 나고, 무중력의 우주공간에 박제가 된 실존의지가 목표 지점을 잃고 유성처럼

떨어졌다가 다시 비상하곤 한다.

2.문발들역

꿈길 속에서 걷고, 뛰고, 달리고, 거꾸러

지고도 아직껏 다다르지 못한 텅 빈 들녘 끝에

아버지, 어머니 생전의 모습이 나비 날개로 아른아른 환상의 한 점으로 일렁이고, 풋고추

달랑거리며 천변(川邊)의 쇠불알 바라보던 유년의 거칠은 종아리가 천진무구한

유리구슬로 콕콕 들어박히는 저 들판은 떫고, 시고, 쓰디 쓴 독한 맛이다. 지금껏

살아본 일 없는 낯선 고을에서 이 저런 풀잎과 들꽃과 졸참나무 그늘을 스쳐 불어오는

바람 한 무더기 물컹 스칠 때 고향은 새삼스럽다. 오래도록, 아주 멀리, 까마득한 옛

일로만 정리됐던 지난 추억이 문득 피동적으로 느껴질 때 도무지 낯설지가 않고 처연한

이색감정에 한없이 매료되는 것이다. 이러한 희열은 포궁(胞宮,子宮) 희기본능에 의한

무의식의 순수경지라 할 것이다.

황이 정승 문상 길에서 문종의 교시로 비롯되었다는 문발(文發). 문.덕. 지를 활짝

꽃피우게 하라. 문(文)이 발(發) 하리라는 지세, 문발리(문발들판, 문발교), 요즘은

공장까지 들어선 문발공단- 이래저래 도타워진 정나미가 고향을 그립게 하고,

역사적 깊이로 묻어진 지운(地運)이 온 몸에 글기운(文運)으로 퍼져서 잘 쓰여 지지

않은 시문도 술술 풀려질지 모를 일이라 얄팍한 야심 하나 쯤 붙잡고 늘어지기도 하고-

문발 들녘에 겨울도 오고, 발등이 덮이도록 쌓인 눈이 철새 떼를 불러들여 끼륵 끼르륵

기러기 떼 날아 내리고, 낙조의 붉은 넋이 온 들녘을 풍선으로 부풀려 눈을

찔러 터뜨리고, 뽀드득 뽀드득 눈 쌓인 논길을 걸으면서 왜 눈은 결백과 순결로만

표상돼야 하는가. 더럽고 욕되게 묘사되면 왜 안 되는 건가. 자근자근 덮씌운

생각~생각~, 한나절 걷다보면 애꿎은 기존 관념을 깨부수고 싶은 충동도 일어나고,

마음도 맑아져 투명체 유리 인간이 된다.

눈을 밟고 가자

흙 묻은 발로 꾹꾹 눌러 힘주어 밟고 가자

선혈이 낭자한 눈을 으깨어 짓밟고

산 넘어 동굴까지 밟고 가자

어제의 눈이 오늘의

하얀 눈이 아니 듯이

누가 나의 눈을 밟아다오

즈믄 날들을 빛바랜 백색 공허는

한천(寒天)의 별빛 냉기로 이마가 시려

투명한 가슴 열어 뵈는 얼음 하늘

하얀 나의 눈을 밟아다오

오늘의 내가

내일의 까만 나를 모르듯이

눈을 밟아보자

텅 빈 들녘 하얀 눈을 다시 보면서

뽀드득 뽀드득

지옥문 번쩍 열릴 큰 소리로

지금까지, 밤에도 하이얀

눈을 밟아보자

졸작 "눈" 전문

3.심학산과 오두산 전망대

조선조 숙종 때 왕궁에서 기르던 학 두 마리가 날아와 숨어든 골, 수소문하여 학을

찾았다는 심학산(尋鶴山), 괴력의 암석이 뒤엉켜 재미나게 붙여진 이름들, 마당바위,

신선바위, 범바위, 맥호바위, 장사바위, 맷돌바위, 만세바위, 굴바위, 두꺼비바위,

퉁수바위, 경기 5악의 하나로 넓은 평야의 구릉지에 우뚝 솟은 교하지역 끝자락,

산남리, 동패리, 서패리에 이어진 해발 193미터의 전설 얽힌 산. 오백년 전의 학이

다시 날아들어 그 시절 그 울움 다시 울며 문발 들녘에 너울거린다. 푹 저려 묵힌

된장 빛으로 한밤을 지킨 산정의 정자에서는 백학의 날갯짓이 천상의 시공을 훨훨

드날리고 있다. 새로 조성된 둘레길로 차별없는 사람들이 시때 없이 오르내려 돌고

돌면서 세월 가듯 흘러 흐른다.

남한강, 북한강이 합수 져서 흘러드는 한강 하류, 서북쪽으로부터 자유의 다리를

휘돌아온 임진강, 두 물줄기가 큰물로 회류(會流)하여 강화도로 빠져나가는 기점, 그래서

교하(交河)-. 초라한 서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유원(悠遠)한 합수 터, 역사의 쓰린 상처를,

전란의 핏빛 아픔을, 어르고, 위로하고, 다잡듯 무심히 흐르는 느린 유속(流速). 답답한 듯,

고통스럽듯, 가슴 터질 듯, 매독균처럼, 호열자처럼, 징그러운 침묵으로 세월의, 역사의

깊이로 오늘의 자아를 덧없이 침몰시키는 큰물의 교합 지점. 예서 살고 죽어 흐르고 또

흘러 있을 뿐. 저렇듯 멈출 수 없는 도도한 물빛 넋을 이제 와서 무슨 말로 노래하고

춤추어야 하리. 무덤까지 함께 갈 반역의 강. 덧없는 거역의 강물 소리로 내일을 울어라.

어른 아이, 남자 여자, 함께 오르고 올라, 오두산(烏頭山) 통일 전망대는 집에서

삼십 리 길, 다시 와서 또 보는 한강 하류, 초병의 눈길로 강물은 멍이 들었고,

뚝심으로 버텨 온 오천년 깊이로 유유(悠,悠)하다. 그래, 너, 어쩔래-지척의 거리에

인공기 펄럭이고, 삼층 벽돌집은 오래도록 묵은 듯 낡아서 허름하고, 거미집 치렁치렁

쥐가 새끼 치는 집을 비운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시대적, 역사적 이념의 갈등으로

범벅된 황토 색갈의 바람이 이마에 차다. 뿔 난 귀신도, 도깨비도 아닌, 우리네 사람이

사는 곳. 한반도의 허리 배꼽 같은 옹골진 땅. 우리 식으로 살아요, 아무 말 말아요,

그냥 바라만 보시라요 동무들. 묵묵부답으로 고요적적 침묵만 깃들인 강 건너 저기,

해묵은 배추씨래기 같은 황토 빛깔로 먼지 풀풀거리는 땅, 황해도 사투리가 보이는,

쟁쟁한 억양이 날아와 귓전에 채워지는 거기, 여기로 이어진 저어- 쪽.

4. 숲속길 마을

중앙공원 교하정(交河亭)에 앉아 있으면 연못의 수련이 살포시 꽃잎을 피워 내밀고,

반긴 듯, 웃는 듯 한낮을 맞으며 수면의 영상은 일렁인다. 토종 붕어며, 피라미며,

자잘한 꽃잉어 무리가 떼 단위로 몰려다닌다. 유모차 밀고 가는 젊은 엄마, 우유병

들고 함께 가는 아빠도 화목한 정감이 사랑으로 뜨는 수련의 꽃잎에 실려 아름답고,

인공의 호수 깊이로 처박힌 자작나무 그림자가 갸웃갸웃 날카롭게 서늘하고,

헛세월, 그래도 유골처럼 쓸어 담고 있는 허접스런 자화상도 물그림자로 일렁이고,

다 못 비운 마음 그대로 지고 오는 발걸음은 무겁다.

참나무 숲속 길은 동굴처럼 시원하고, 엇샤~ 엇샤~ 힘차게 팔 젖고 가다 보면

하늘걷기에 여념이 없는 할머니 다릿발도 일렁거리고, 천개 쯤 흔들흔들, 시조가락

올린음 꺾어 여미듯 구성지게 리듬을 타고 가면 아랫도리 사타구니가 욱신욱신 뻐근거려

온다. 돌려돌려, 좌우로 온 몸 허리 비틀어 두 발 모으고 힘껏 돌려~돌려. 오백 개 쯤

세다말고 까빡 숫자 잊어 다시 시작하다 보면 뱃창자도 울렁울렁 땡기고 뻗치는데

온 몸의 기름 찌꺼기 찔끔찔끔 빠져 나올 듯 속마음도 개운타.

나무줄기를 타고 오르는 못 말리는 담장이 덩굴은 옛스런 멋을 한껏 뽐내기도 하지만,

나무를 죽일 수도 있어 날마다 눈에 가시로 찔린다. 유난스런 결벽증도 아닌, 그렇다고

살의가 번뜩이는 악의도 아닌, 순수열정의 봉사정신으로 200그루 쯤 담장이 덩굴을

걷어내다 보면 땀으로 온 몸 흔근히 젖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구차하게

연명하고 있는 덩굴을 이틋날 마저 거둬내면서 강인한 천혜의 생명력, 자연의 섭리에

진저리 치고, 엄습한 두려움에 오싹 한기 느낀다. 만수산 드렁칡이 엉켜진들 그 어떠리.

하여가(何如歌)의 그 칡덩굴도 예 있었구나. 공원의 나무를 고사시키는 주범이 바로

네놈 이였구나. 헤치고 들쳐서 뎅겅뎅겅 밑둥을 잘라내다 보면 힘도 빠지고, 끝도 안

보이는 부질없는 일에 헛심만 빼는구나 싶어 망연자실 그냥 서 있어, 하늘 땅이 점지한

오묘한 섭리를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담. 우주 만공으로 억만 세대를 살아 숨쉬는

지엄한 생명력을 감히 덤벼들어 어찌하겠다고. 무엄한 배반, 하늘의 역신이구나-.

5.거기, 그대로 있는 사물의 세계

파주시교하읍동패리책향기로371. 숲속길마을 아파트 11층,산우서실에서는 교하도서관이

발밑으로 내려 보이고, 검푸른 녹음을 차일처럼 떠받친 나무들 기둥 사이로

끊어진 듯 이어지는 공원의 산책로는 마을 사람들이 차별 없는 제 각색의 차림으로

마주보아 스쳐 지나고, 고개 돌리면 눈높이로 그냥 보여 지는 그 풍경, 그 사람들,

지금 객관적으로 보고자 한다.

견자(見者)로서의 시인 랭보나, 보는 법, 객관적으로 말하기,

눈에 보이는 말로 정리되는 신시집(사물시집)을 낸 릴케나, 의미로 덮씌운 세계와

조건화된 주관을 극복코자 무의미(無意味) 시를 썼던 김춘수나, 존재 자체에 시선을

돌렸던 오규원이나, 주지적 서정시로 일가를 이룬 김광림이나 이들 모두 주관의 과잉에서

벗어나고자 했듯이 눈으로, 가슴으로, 머리로 그렇게 사물의 존재가 보일 때까지-.

자명한 비밀로 가려진채, 거기에 그냥 있는 그것으로, 저 혼자 충만 된 사물의 존재들.

누군가 말해주길 고대하는 그것들. 답답하고, 궁금하고, 저리고, 시려 아프다.

여기에 와서 한동안, 지금까지, 글도 시도 아무것도 쓸 수 없는 무서운 병을 앓아;

호전되지 않는 갈등과 혼란의 중증 병세임을 알면서도 병원에 갈 수 없는 증세라, 뻔히

다 아는 현란한 고통을 앓고 있음이네.

중앙공원 나무 아래로

세 사람이 걸어가네

큰 나무 그림자는 어둡고

다른 나무의 그림자는 묻히는데

한 사람의 발걸음은 환하게 드러나고

두 사람의 어깨는 그늘져 어둡네

모두의 간격은 제 각각인데

앞 사람은 뒷 사람을 당기고

뒤엣 사람은 앞 사람을 밀고 가네

모두의 그림자를 신창에 우선 깔아두고

다시는 되돌아서지 않을 듯이

팽팽한 긴장감이 동작을 이끄네

어느 틈에 햇빛이 정수리를 짓눌러

압축된 그림자가 정오를

세 점 찍네.

졸작 "정오의 그림자" 전문

두 물줄기 크게 합쳐 서해 바다로 흘러가는 교하(交河), 주관과 객관이

융합되어 새로운 객관의 세계를 큰 틀로 구축하려는 글병(詩痛)은 언제 쯤

치유 될런지 모르겠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