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明 熙
새벽 한시가 넘은 것 같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느낌이 이상하여 눈을 떴다. 놀랍게도 방안 가득이 달빛이 넘쳐나고, 그 달빛은 살포시 나를 감싸 안는다. 정말로 오랜만에 맛보는 고요함이고 평안함이다.
생각지도 않은 달빛이 어인일인가 궁금하여 날 자를 계산해보니, 오늘이 낮의 길이가 가장 길고 해가 제일 높게 뜬다는 하지(夏至)이다. 하지절기에는 태양의 고도가 높아져 방안까지 햇빛이 들어오지 못한다. 햇빛과 같이 달빛도 방안까지 들어오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의외로 깊숙이 들어왔다.
잠결에 달력을 보니 음력 5월 17일 이다. 보름을 이틀이나 넘겼는데도 달은 둥글고 밝다. 밝은 달빛이 방안 깊숙이 들어올 수 있었든 것은 하지 절기이지만 달의 고도가 높지 않았고,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산 중턱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아늑한 공간에서 일광욕 하듯이 알몸으로 달빛을 받아 월광욕(月光浴)을 즐겼다. 알몸에 쏟아지는 달빛은 얼룩덜룩한 늙은이의 살갗을 하얀 살결로 보기 좋게 바꾸어놓았다. 모든 것을 환하게 드러내는 햇빛과 달리 달빛에는 감출 것은 감추면서도 드러낼 것은 선명하게 드러내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은은한 달빛이 감성을 자극한 때문인지 잠은 멀리 달아나고 문득 떠오른 상처 하나가 슬픔으로 다가왔다. 아니 아련한 추억으로 다가왔다. 66년 전, 살구가 누렇게 익어가든 6월에 북한공산군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났고, 그 전쟁으로 나의 소년기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1951년 1월 4일,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피난길에 올랐다. 아버지는 청년단원들과 함께 대전으로, 어머니는 어린 동생 넷을 데리고 이천으로,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종형과 함께 경북 김천으로 피난을 하였다.
초등학교 5학년인 열 두 살짜리 소년은 짐을 잔뜩 실은 손수레를 밀며 집을 떠나 열하루 만에 김천에 도착하였다. 김천에 도착하니 군인들이 대구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여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김천 외곽에 방 한 칸을 얻어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전쟁추이를 살펴보기로 했다.
다행이 전황이 호전되어 이른 봄 피난 생활을 끝낼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부모님과 동생들은 이미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막내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피난지에서 돌림병으로 죽어 그곳에 묻고 왔다고 했다. 거기에다 엎친 데 덮친다는 격으로 집은 폭격으로 불타 잿더미가 되었고, 피난 갈 때 광 밑을 파고 묻어두었던 곡식은 모두 까맣게 타 버렸다. 당장 먹을 양식과 잠자리, 입을 옷가지가 문제가 되었다.
피난에서 돌아온 다음해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때 찍은 졸업사진에는 우리 가정의 어려운 경제상황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사진에는 나와 세친구만이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다. 그 바지저고리마저도 어머니가 밤새워 꿰매고 정성 것 다려 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 중학교 진학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고향에는 ‘숭실중학교 분원분교’가 있었다. 나는 그 학교에 진학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부친께서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하셨다. 조부께서 서울에 사셨기 때문에 숙식문제는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조부모님 댁 가까이에 있는 성동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그때는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져 도강증(渡江證)이 없으면 한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서울 소재 중학교에 입학허가를 받은 학생들만을 임시로 수용하고 있는 ‘광주중학교 특설반’에 입학을 하기로 했다. 문제는 입학금이었다.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한 나는 집에서 애만 태우며 3개월을 놀고 지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어렵게 입학금을 마련해주셔서 6월말에 중학생이 되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
어렵사리 시작한 중학교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3 개월 만에 입학을 하다 보니 공부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경안까지 다니는 버스도 없어 편도 12Km, 왕복 24Km를 걸어 매일 학교에 다녀야 했다. 말이 24Km이지 열네 살 소년에게는 너무나 힘든 통학 길이었다. 자연스레 학교에 빠지는 날이 많아졌다. 가뜩이나 늦게 학교에 들어 간 데다 가 결석하는 날이 늘어나다보니 학습부진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의 무리한 통학은 그해 12월 서울 신당훈육소(성동중학교)로 전학을 하면서 끝이 났다.
나에게 중학교 1학년과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때의 학습 결손은 두고두고 나를 힘들게 하였다. 다른 과목은 그런대로 따라갈 수 있었으나 영어는 따라갈 방법이 없었다. 그때 고향에 있던 중학교에 입학을 하였으면 어떠하였을까? 그랬다면 중학교 3년 내내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하여 시험 볼 때 마다 쫓겨나는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텐데… .
6·25 전쟁으로 시작된 우리 가족의 가난한 생활은 부모님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3년여 만에 막이 내려졌지만 그때의 상처는 오랫동안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그 아픈 상처도 오늘처럼 하얀 달빛이 포근하게 감싸 안는 밤이면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아련히 떠오른다.
나는 가난으로 얼룩진 소년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금 수저니 흙 수저니 하면서 불평등을 이야기하는 하는 사람을 보면 배부른 소리 그만하라고 마음속으로 힐난을 한다. 금 수저든 흙 수저든 간에 수저란 것을 가졌으면 우선은 된 것 아닌가, 수저라는 것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햇빛이 앞을 내다보게 하고 희망을 이야기 하게 한다면 달빛은 뒤를 돌아보게 하고 추억에 빠져들게 한다. 나는 슬픔으로 얼룩진 상처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바꾸어 놓은 달빛에서 사랑과 정겨움을 본다. 달빛에는 감성을 일깨우고 사랑과 정을 나누게 하는 신비한 힘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치유의 힘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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