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의 공허
한 시대의 특징은 그 시대에 혼재한 가치 그리고 비가치적인 것을 구별하도록 시련을 준다. 한 사람의 탄생은 시대와 묶여 있고, 시대의 특징은 한 사람의 정신적 특징을 형성한 質料가 되면서 평생을 좌우하는 무의식의 샘이 된다. 여기서 받은 시대적 인상이 미래의 맥을 형성하기 때문에 시대의 표정은 시인의 의식구조 속에 잠겨 있게 된다. 이런 논지에서 볼 때 林和의 일생은 근대사의 울분이 점철된 시대였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순종에 양위, 한국
군대 강제 해산. 1909년 안중근의거사건, 1910년 경술국치에 이은 정치 상황, 독립이라는 절대 명제와 외세의 문물이 무분별하게 유입될 때, 이 나라 젊은이에겐 좌표없는 삶이었고, 암담한 한 시대의 기류였다. 외세에 의한 타율적 개화(開花)로 자주의식의 배태(胚胎)는 가치와 비가치가 혼재했고, 여기서 살아남기 위한 두 개의 몸짓이 나뉘어졌으니 친일과 반일이라는 민족사적 명제가 개인적 생존과 관계된다고 믿을 때, 민족이라는 至高至善의 단위가 무너지게 된다. 이런 혼란 속에서 林和는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게 된다. 1920년대 후반 KAPF의 주도권을 잡고, 문학의 내용과 형식논쟁에서 박영희 쪽에 가담하여 김기진을 공격하다가 1930년대 이후엔 김기진을 카프의 회장으로 내세우고, 박영희를 공격했던 행위에서, 문학보다는 오히려 문학의 옷을 빌려 입고, 정치적인 관심 쪽에 집착하게 되었던 결과 林和의 정신 구조는 시대의 격랑 속에 살아남는 법을 재주로 익힌 비문학적 관심을 앞세우면서 문학을 하위개념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또한 일제 말기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광복 후에 조선문학건설총본부, 1945년 조선문학가동맹의 간판을 걸고 예술성을 외면한 일에 관심의 가치를 두었다. 김동석의 말처럼 “그는 시인이면서 시인이 아니었다.”는 실감나는 표현이 林和의 모든 문학적 행적을 말하고 있다.
어떻든 불구적 시대를 살아온 林和의 詩 표정이 어떻게 표출되는가를 1938년 詩集 『현해탄』(41편)과 해방 이후 『讚歌』(21편)에 나타난 작품을 통해 정신 지표를 점검하려 한다. 특히 『讚歌』는 1부(部) 15편이 해방 이후 작품이고 2部 6편(「바다의 찬가」 재수록 제외)은 해방 이전의 작품으로 도합 62편을 논의 대상으로 한다.
어둠
임화의 시에 맨 먼저 닿는 느낌은 어둠이다. 무명 이전의 노자에서 느끼는 어둠도 아니고, 창조가 예비된 아득한 곳, 天은 玄하고 地는 黃하다는 식의 어둠도 아니고, 안식의 개념이 포괄된 어둠 또한 아니다. 방황과 유랑과 고뇌와 저주가 들끓는 것도 같고, 때로는 창조의 문법이 들락거리는 어둠이 임화의 詩에 나타나는 어둠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어둠이 뚜렷한 목적으로 확정된 결정체가 아니고 시대의 표정이 용해된 은폐와 관념의 느낌이 엉켜있는 어둠이다. 이런 현상은 문학적 열망과 필연적 욕망에 의해 詩를 쓴 林和가 아니라 시대적 편리에 따라 문학의 옷을 바꿔 입으면 된다는 안이한 발상으로 보인다. 가령 日帝治下 李陸史의 詩에 어둠(겨울)이 生命의 저장소였고 내일을 예비하는 생각을 가진 은신처로서의 어둠이었다면, 韓龍雲의 어둠 또한 창조로서의 無요, 끊임없는 윤회가 머무는 어둠이었고, 辛夕汀의 어둠은 꿈꾸는 공간이었던 사실과는 사뭇 다르다.
원래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 태아로 있을 때의 대양 같은 안정감을 그리워하는 심리가 있다. 주거는 바로 모태에 해당된다. 극락 열반의 개념인 胎內空想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으며 동양의 도참설의 혈(穴) 또는 明堂의 발상도 胎內空想의 정신분석학적 근거 하에 있다. 어둠은 부활을 염원하는 장소가 되고 근원으로의 회귀(回歸)가 된다. 老子는 동굴 속에서 태어 났으며 예수의 메시지 역시 “탄생의 동굴” 속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어둡다는 밝다와 대응되는 말이다. 어둠과 밝음은 무엇으로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는 지극히 쉬운 문제이지만 좀더 깊이 생각할 때는 난감해진다. 낮에 빛이 있다면, 어둠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때, 빛은 어디서 어떻게 오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답안은 쉽게 나타나지 않고 오리무중으로 들어간다. 삶과 죽음만 해도 그렇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음이란 또 무엇인가의 본질 앞에서 막연한 혼란에 떨어진다. 생명과 무생명은 현상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현상 뒤에 있다고 믿는 생각 때문에 본질적인 정의를 유보할 수밖에 없다. 모든 생물의 생명현상을 이동(운동)하고, 영양, 생장, 호흡, 배설, 감수성(자극반응)적응과 생식 등의 특성을 가진 물질대사(metabolism)라는 말로 생물학은 언급하고 있지만, 그 말을 정답으로 생각하는 학자는 없다. 다만 그럴 것이다의 특징의 집합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서 어둠과 빛이라는 말도 생물학적 구분의 원리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에다. 움직임이 낮이라면 낮의 근원은 어둠일 것이고, 어둠은 낮을 잉태한다고 볼 때, 닭과 계란의 어설픈 순환논리와 기린 증상에 떨어진다. 어떻든 밤과 낮은 분리할 수없는 것이 아니라 동심원(同心圓)의 관계 속에 파악될 때 어둠은 부정이나 불안이 아니고 태내(胎內)의 안식과 꿈을 도출하게 된다. 임화의 밤은 여러 얼굴로 분화한다. 다만 맥락이 일치하지 않는 미숙성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나는/태양과 더부러/별들을 /낮과 더불어/ 밤 밤을/사랑하고/한 밤중/죽어가는/낡은 세계를 위하여/미칠듯/조종(弔鐘)을/난타(亂打)한다//아/역시 나는 /밤의 시인이다.
- <밤의 찬가>에서
장시(長詩)라는 명칭을 붙일 때, 거기엔 몇 고비의 의미가 분단(分段)으로 나누어 개별에서 종합된 의미로 모아져야 한다. 그러나 무작정 길어진 것이 장시라는 말을 붙인다면 이는 길이만 가지고 판단하는 잘못일 것이다. 임화의 시를 점검하는데서 만나는 첫 번째 당혹성은 무한정으로 길어진 길이에 있다. 그렇다고 정치(精緻)한 의미의 연결(정서와 정서)이 일목요연하느냐 할 때 오리무중의 꼬리가 되고, 미로(迷路)로 들어가서 다시 미로로 나오는 당황을 만난다. 이로 보면 林和의 詩에 詩人이라는 명칭을 선사할 수 없다는 金東錫의 「林和論」은 정당한 안목이 된다. 어떻든 ‘밤’에 대한 林和의 심리적 축적은 무엇인가를 찾아가려는 의도(意圖)를 보이는 장소가 밤이다. 다시 말해서 메시지가 송출(送出)되는 진원지가 밤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태양과 별, 그리고 낮과 밤의 상대성에서 무엇을 사랑하는 가의 명백성(明白性)이 없다. 느닷없이 ‘사랑하고’의 대상이 ‘밤’이라는 근원에서 죽어가는 ‘낡음’을 향해 鐘을 난타하는 행위가 돌출된다. 물론 밤이 ‘낡음’으로 파묻혀가는 현상적인 것에 대한 염려이거나 詩人의 거부반응이 야심으로 나타난 징조로 보일 수도 있다. 죽어가는 낡은 것들이 낮으로 살아나기를 바라는 詩人의 생각은 밤에서 아름답고 꿈 많은 공상을 키우는 것보다는 대담하고, 가멸찬 손짓을 배우려 한다.
나는/시껌은/갈비ㅅ대 속에/꿈틀거리는/밤의 그/大膽한 意志를/한량없이/사랑한다.
- <밤의 讚歌>에서
‘나는/밤의 詩人이다’는 선언적 의미가 대담한 의지(意志)로 초점이 모아진다. 다만 갈빗대라는 의외의 詩語가 나타남으로써 범상하지 않는 느낌을 배가 해준다. 이는 林和의 정신 속에 감춰진 의지의 잠재된 양상이 드러날 것을 기다리는 표현이다. 그는 문학을 수단으로 정치적 목적을 향하는 욕망의 일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亦시 나는/밤의 시인이다”라는 심리적 선언은 행동의 합리성과 정당성으로 나타나기보다 오히려 은폐 속에 자기의 활로를 탐색하는 도피의 공간(空間)으로 훨씬 용이한 대상이 됨직하다. 또한 시대적 상황이 일제라는 암담한 배경은, 日治下에 많은 시인들이 체념(諦念)과 도피의 수단으로 선택했던 곳이 어둠이었음을 생각할 때, 林和에게는 전자와 후자를 합치한 개념이 더욱 유력할 듯하다. 어둠에 가장 많은 징후가 절망 의식이다.
너른 바다 위엔 새 한 마리 없고, /검은 하늘이 바다를 덮었다.//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배는 한 곳에 머물러 흔들리기만 하느냐?//별들이 물결에 부디쳐 알알이 부서지는 밤,/가는 길조차 헤아릴 수 없이 밤은 어둡구나!
- <밤 甲板 위>에서
당신의 마음은 이미 잠들었음니까?/등불 하나이 없이 캄캄하니 답답습니다.
- <故鄕을 지내며>에서
그러나 오늘밤 얼굴의/깊은 주림과 꺼진 눈자위가/밤하늘보다 오히려 어두워,/타고 있는 조그만 배가/장차 닿을 항구의 이름조차 알 수가 없다.
- <다시 인젠 天空에 星座가 있을 必要가 없다>에서
<밤 甲板 위>엔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이 깔려 있다. 바다 위에 새가 없다면 그 바다의 밤은 틈새가 보이지 않는 아픔이고 죽음이 깃들어 있는 암담한 공간이다. 배들이 왕래하는 것도, 별들이 하늘에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파도에 부서지는 절망의 심도만 짙게 나타난다. 이로하여 林詩人은 ‘가눌 길조차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밤으로 들어간다. 이런 사실은 시인의 심리적 현상과 관련이 있다. 시어는 詩人의 정신적 흔적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두운 밤은 곧 시인의 정신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암울한 징후는 시인의 의식에 불안한 표정을 암시한다. <故鄕을 지내며>에서도 ‘등불 하나이 없이’ 때문에 답답이 드러나고 <다시 인젠 天空에 星座가 있을 必要가 없다.>에도 ‘조그만 배가’ ‘닿을 곳이 없는’ 절망에 허덕이는 느낌이다. <故鄕을 지내며>에서도 잠든 마을에 조용하고 아늑한 정경이 아니라 ‘답답습니다.’ 때문에 사방이 막히고 절망적인 고뇌가 깃들어 있는 공간으로 우울한 풍경의 음산함이 느껴온다. <다시 인젠 天空에 星座가 있을 필요가 없다.> 역시 조그만 배가 정박해야 할 목적지가 없는 늪에서 허덕이는 느낌이다. 하늘에 성좌(星座)가 있다면 배는 목적지를 향해 떠날 수 있지만, 하늘과 땅 어디에도 목표로 삼을 좌표가 없는 세상이기에 절망의 비탄을 앞세울 수밖에 없다. 이런 林和의 뇌수 속엔 오로지 현실의 암울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 내일에 신념을 가진 사람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축적하게 되고 더욱 먼 길을 항해할 수 있다. 그러나 林和의 詩는 절망의 변증법이고 그런 고통에 자기를 구원할 지적 충전의 방도를 찾기 위한 구체적 흔적이 전무하다. 이런 원인을 김동석은 詩를 쓰는 목적과 수단을 구별하지 못했다는 말로 신랄하게 비평하고 있다.
林和의 詩를 무슨 공장의 기계소리처럼 요란스럽게 만든 원인의 하나는 林和는 詩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수단으로 썼다는 것이다. 詩와 행동 새중간에서 갈팡질팡하는 자의식이 林和로 하여금 詩의 세계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고 압력이 강한 현실을 詩로서 움직여 보려는 청춘의 용만이 그를 詩人으로서 오류를 범하게 한 것이었다.
시인의 조건을 한 마디로 집약할 수 없다. 언어를 빚는 데 남다른 솜씨를 익히고 상상력의 뛰어남이 있어야 하고, 현실을 바라보고 미래를 통찰하는 예리한 감각이 갖춰져야 한다. 현실에서 미래의 다리를 연결하는 시적 방도를 시인에게 요구한다면, 임화는 현실의 크기에만 압도당했지 미래를 연결하는 통로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임화의 시는 잡박한 散文을 토막 낸 나열에 그치게 되었으니, 그 결과 답답하고 암울한 표정만 연출하게 되었다. 이런 원인 때문에 임화는 현실 속에 감투자리만 탐내는 어설픈 말장난에 떨어진 원인을 만들게 된다. 시인은 어지러운 시대의 등불을 켜들어야 하고, 예언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가 눈을 뜨고 어둠 저 켠 세계를 바라 볼 수 있는 통찰력과 혜안이 있기 때문이라면, 임화는 맹목의 검은 안경을 끼고 현실의 어둠만 바라보고 미래의 불빛을 바라볼 수 없는 조급함 때문에 그의 시에 어둠은 비젼이 들어 있지 않다.
‘밤의 굳은 손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 누일 때,/그저 運命에 從容함이 오는 아침을 爲하여 가장 賢明할 것이다.
- <나는 못 믿겠노라>에서
임화는 순명(順命)에 거역할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지성이라는 간판을 내세워 자기를 구원할 힘도, 그래야 할 시대적 소명의식도 없는 것처럼 가라앉아, 더 갈 곳이 없는 비극적인 발성이다. ‘이 두렵고 미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진 구렁 속에서,/밤의 몸집은 한없이 크고 넓게 성장하며,/나는 새벽 港口를 멀리 남긴 채 나이 먹고 늙어서 죽어갈 것일가?’처럼 임화의 절망은 구체적인 대상이 없다.
인간은 절망 속에 도전의 깃발을 높이 들 때 역사는 새로운 장면을 연출하게 된다. 의지와 신념이 공고할수록 빛나는 업적이 따라오고 고통에서 탈출하는 영광을 만난다. ‘이 두렵고 미운 모든 것’이라는 집합대상이 밤으로 묶이었고 ‘크고 넓은’ 이유 때문에 멀리 있는 항구에 닿을 수 없어 늙어감을 한탄하는 임화의 의식구조는 무기력한 바닥에서 벗어날 방법을 잃어버렸다.
林和의 詩에 또 하나의 어둠은 유동(流動)하는 이미지인 강이나 바다를 통해 빛으로 건너가려는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얼마나 적극적인 가는 의문이 앞선다. 어둠은 임화의 현재 의식이고, 江으로 어둠을 건너 빛의 세계를 지향하는 간편한 구도를 보이고 있지만, 의식의 치열성이나 가열한 정열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대체 어디를 가야 이 밤이 샐가?/애들아, 서 있는 네 다리가 얼마나 아프겠니?/車는 한창 江가를 달니는지,/물소리가 몹시 情다웁다.
- <夜行車 속>에서
‘이 밤이 샐가?’ 의문에서 밤이 벗어나고 싶은 대상이고 미움과 아픔이 모여 있는 곳이지만, ‘얼마나 아프겠니?’의 발문에서 적극성은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江을 달려가는 기차의 이미지에서 情다움을 느끼는 이동의 느낌이 매우 소극적이지만 벗어나야 할 어둠의 인식이라는 데서 林和의 심정은 간절하다. 구체적인 표현을 인용한다.
우수수! 딱! 꽝! 우르르!/ 巖壁이 무너지는 소리, 千歲의 巨樹가 허리를 꺾고 넘어지는 소리,/死滅의 하늘에 野獸가 戰慄하는 소리,/끝없는 어둠 沈黙한 暗黑,/오오! 萬有로부터 秩序는 물러가는가?/이 無邊의 大空을 흐르는 運命의 江 두 짝 기슭/生과 死, 前進과 退却, 敗北와 勝利,/和解할 수 없는 兩 언덕에 너는 두 다리를 걸치고, 懷疑의 흐득이는 心臟으로 말미암아 全身을 떨고 잇지않느냐
- <闇黑의 精神>에서
아마도 임화의 정신 구조를 가장 잘 드러낸 부분으로 보인다. ‘끝없는 어둠’에서 ‘운명의 江’ 이쪽과 저쪽을 확실하게 선택하는 마음이 아닐 때 고뇌가 따른다. 이것인가 저것인가를 계산하기 때문에 ‘敗北와 勝利’ 사이에서 ‘懷疑의 흐득이는 心臟’이고 전신이 떨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삶에 승리만이 빛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참된 패배(敗北)엔 위대한 승리가 깃들어 있는 법이다. 항상 승리만을 위하는 사람은 영원한 패배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패배의 참된 의미는 절망이 아니다. 임화는 어둠과 빛, 그리고 절망과 희망의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림자 긴 절망의 옷을 입었다.
물론 나그네들이야 집도 없고 길도 없다./ 그 대신 희망이 꽉 찼더라./ 눈동자는 굴 속 같아야,/ 한점 불이 별 같고,/ 가슴은 한층 밝아,/ 밤새도록 환히 아름답더라./ 내야 눈마저 흐리다만,/ 아직 외롭지 않다.
- <안개 속>에서
洛東江 가 龜浦벌 위 갈꽃 나붓기고,/ 깊은 밤 停車場 등잔이 껌벅인다.
- <밤 甲板 위>에서
별도 없고/ 바람도 죽은/ 어둔 밤/ ...略...아아/ 한쌍의 눈알이/ 아즉도/ 별과 더부러/ 빛나고 있었단것은/ 얼마나/ 즐거운 / 일이냐
- <별들이 合唱하는 밤>에서
<안개 속>에 시인은 객관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은 외롭지 않다는 정서감염을 보이면서 즐거움에 젖어든다. 그러나 대상과 시인의 거리(距離)가 육화되지 못하고 막연히 바라보는 안타까움만 남았다는 데서 시적 감흥도 막연할 뿐이다. <밤 甲板 위>의 등불이 육안으로 보이는 것과 ‘정거장’에서 오는 이미지가 먼 길을 떠나는 생각을 이끌어 온다. 기차가 먼 등불이 있는 세계로 떠나려는 느낌이 결코 슬픔이 아닌 이유는 ‘등잔’이라는 목표 앞에 빛이 있기 때문이다. <별들이 合唱하는 밤>에서도 절망의 어둠에서 눈이 별로 지향하려 할 때 ‘즐거운 일’로 다가온다. 이런 풍경화엔 시인의 적극적 행동이 수반되는 의지가 없지만, 어디로 향하려는 마음인가를 느끼게 한다. 이로보면 시대적인 절망의 어둠에서 빛을 추구하려는 林和의 생각은 생물학적 일광추향에 합당한 의식을 앞세웠지만 구체적 방도를 찾으려 하지 않은 소극성에 머물고 말았다.
2. 詩人의 자화상
거울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기확인(自己確認)의 방편이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를 확인하는 것은 외모의 일부분일 뿐 내면세계(內面世界)를 바라보는 방도는 없다. 인간은 시간이 흐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때문에 자기를 각인(刻印)하고 싶은 열망을 갖는다. 이런 열망이 과도할 때 추한 욕망의 노예가 된다. 시간은 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이 만든 시계가 움직이고 있고 인간이 지나가는 것이다. 움직이고 있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물질이다 인간이 지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내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은 초조한 모습으로, 때로 추한 모습을 연출한다. 임화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시 속에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고백을 그린다.
네가 한 마리 이름 없는 벌레와 다른게 무엇이냐./ 고지식한 마음이 提出하는 質問의 對答을 찾으려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하늘을 向하여 고개를 들었을제, 甚히 怒한 太陽의 表情에 / 두 손으로 나는 얼골을 가리었다.
- <벌레>에서
인간은 자기를 알 때면 겸손해진다. 그 해답은 자기존재가 별로 크지 않다는 비교의 안목에서 그렇게 변모된다. 무지와 무식은 만용이 되고 앎은 겸손의 큰 그릇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임화의 면모를 詩 속에 -은폐 없이 고백된-나타난 언어 흔적으로 보면 매우 여리고 감상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시의 표현과 일상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인상은 한용운의 경우에서도 만나게 된다. 한용운의 詩는 사랑이라는 시어의 과도한 사용과 ‘하여요’ 등의 여성 편향적인 결미처리에서 그가 살아온 웅대한 남성적 행동-독립 운동-과는 판이한 표정이었다면 임화의 詩는 부끄러움이 가득하다. 물론 무엇에 왜라는 구체적인 대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는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해답 이전에 문제를 노래하는 경우가 흔하다. 시는 삶을 완벽으로 결정지우는 작업이 아니라 삶의 과정을 아름답게(혹은 추하게든) 노래하는 데 목적이 있다면, 구체적 대상이 없다는 것은 林和의 詩에 흠집은 아니다. ‘甚히 怒한 태양’에 나는 두 손으로 ‘얼골을 가리었다’에서 나와 태양의 관계를 유추해야 한다. 왜 태양이 怒한 표정일까? 이는 ‘나’라는 관계에서 주관적(主觀的)이다. 시를 읽는 행위는 시인의 주관적(主觀的) 고백(告白)(詩는 告白)을 객관적인 거리(距離)로 환산하여 감동을 맛보는 행위라면, 태양은 불변(不變)과 정의(正義)와 옳음으로 문학적 상징(象徵)이 된다. 내가 태양을 바라 볼 수 없는 자괴(自愧)는 현실을 살아가는 굴절에 있다는 생각이다. 사는 일을 회상하는 것은 모두가 부끄러움이다. 자만을 앞세운 삶이 아니라 사랑을 앞세운 생이라면 더욱 부끄러워 진다. ‘너의 적(敵)을 사랑하라!/ 福音書는 나의 光榮이다.’ <敵>에 이르면 선량한 눈에 부끄러움과 사랑의 암시는 인간이 갖는 겸손의 표현일 것이다. 林和의 내면의식이 여리고 순박함을 나타내는 시는 <가을 바람>이다.
나무 잎 하나가 떨어지는데,/ 무어라고 네 마음은 종이풍지처럼 떨고 있니? / 나는 서글프구나 해맑은 유리창아!/ 그렇게 단단하고 차디 찬 네 몸,/ 어느 구석에 우리 누나처럼 슬픈 마음이 들어있니?
- <가을 바람>에서
가을은 정서를 일깨우는 환경을 제공한다. 정지용은 유리창에서 아들의 죽음에 비극적 인식을 지적 견제로 시화(詩化)에 성공했지만, 임화의 유리창은 ?와!에서 풍비박산을 만들어 버렸다. ‘떨고’와 ‘서글프구나’와 ‘슬픈 마음’이라는 흥건한 감정의 노출 때문에 시인의 여리고 순박한 마음을 내 보일 수는 있지만 시적 성공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이로 보면 林和의 詩는 언어가 무엇인가라는 일차적 문제 앞에서 감정만 나타내 보이고 좌초된 실패의 표정을 만나는 셈이 된다. ‘참말로 한 방울 눈물 속은 이 모든 것이 들어 있기엔 너무나 좁다.’<눈물의 海峽>는 고백 속에 세상을 집어넣으려는 임화의 정신 거점은 한계 앞에 탈출로를 마련하지 못한 우울과 만나는 격이다.
3. 청년의 표정
인생을 몇 단계로 나누는 것은 삶의 단위가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데서 오는 편리함일 수도 있으며, 삶의 이력을 특정지울 때 비유의 편리함이 될 수도 있다. 가령 어린이에서는 꿈과 희망을 건져 올리고, 청춘에서는 힘과 아름다움을, 장년에서는 원숙함을, 노년에서는 저물어가는 날들의 아쉬움과 지혜를 배우게 된다. 임화가 살아온 시대는 모순과 비극에 나포된 젊음이었다. 이는 시대가 만든 커다란 원인이었고, 이 원인 속에 개인적인 꿈과 정열은 극심한 좌초와 시련을 불러왔다. 청년에 지성이 들어있지 않으면 경망스러워진다. 청년에게 내일의 야망이 없다면 더욱 비굴해진다. 임화의 시 속에 청년의 표정은 기력이 없다. 김동석의 지적을 옮겨본다.
‘靑年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것도 이 詩集(현해탄)의 특징이오. 絶叫니 怒呼니 하는 말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이런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일제(日帝)의 압박에 못 이겨 몸부림친 靑春의 자태다. 허지만 울고 몸부림치는 것은 예술로선 詩 이전이요, 정치로선 센티멘탈리즘이다.
金東錫의 말은 이미 林和의 詩는 거덜 난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는 혹평이다. 시인으로서나 정치적 행위로서 모두 실패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청춘이라는 표정을 어떻게 시화(詩化)했는가를 점검함으로 그 대답의 확실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한 개 여윈 청년은 아직 살았고,/ 또다시 우리집 능금이 익어 가을이 되리라.
- <一年>에서
.......어머니도, 고향도, / 나에게는 소용없었다./ 나는 젊은 청년이다......
- <荒蕪地>에서
임화의 시에 가장 극명(克明)해야 할 비유의 청춘은 힘이 없다. 김동석의 지적처럼 일제탄압이라는 외풍(外風)을 내세울 수 있지만, 시인의 의지와 현실과는 꼭 같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데서 임화의 청춘은 일관성을 일탈했다. 시는 꿈을 노래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공소한 꿈이 아니라 가능성(probability) 속에 나타날 노래이기 때문에 감동의 신기루를 제공하는 것이다. <一年>에 청년은 ‘여윈’이라는 수식어가 붙음으로 살아있음이 곤고하고 매우 처량하다. ‘아직’이라는 부사의 뉘앙스와 가을이라는 상황에서 청년은 웅대한 지평(地平)을 놓친 시름겨운 표정을 만나기 때문에 <荒蕪地>에 어머니와 고향이 소용없는 절망의 바닥에 떨어진다. 『현해탄』엔 청춘과 고향이라는 시어가 상당수 등장하지만 꿈과 그리움의 마지막 공간이 아니고 패(敗)한 사람의 시름겨운 장소로 인식된다. 어머니와 고향은 동일 이미지이다. 젊은 청년이 찾아가야 할 마지막 의지처에서 ‘나에게는 소용 없었다.’라는 고백은 달리 방도가 없는 좌절의 표현이 되었다. 그러나 <한여름 밤>에선 별과 청년의 이미지가 하늘의 별을 지향(志向)하는 이미지를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시적 강렬성은 완만한 느낌이다.
靑年들은 늘 / 希望을 안고 건너가, / 결의를 가지고 돌아왔다.
- <玄海灘>에서
깊고 긴 밤이/ 靑年들의/ 머리 우에 둥그런/ 아득하고/ 무연한 하늘가에/ 어린 별들과 密語를 주고 받든/ 총총한 눈알들아.
- <한여름 밤>에서
임화의 시는 사물과 시인이 육화되지 못하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명령하는 기법(技法)을 즐겨한다. 명령어가 많다는 사실은 결국 감동의 반감 현상을 초래했고, 지도자연(指導者然?)한 시인의 일생이 이데올로기의 포로에 파탄의 문패를 달게 된 것과 무연하지 않다. ‘청년들은 늘’에서와 '총총한 눈알들아’에서의 객관거리가 시적 상징으로 접합되지 못할 때 공소한 헛소리에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시인은 몰랐던 게 아니다. <地上의 詩>를 보면 임화의 시를 말하는 시론의 역할을 담고 있다.
말을 行爲로, / 行爲를 말로,/ 自由로 飜譯할 수 있는 機能,/ 그것이 詩의 最高의 原理,/ 地上의 詩는/ 知慧의 虛僞를 깨뜨릴뿐 아니라,/ 智慧의 悲劇을 救한다./ 分明히 太初의 行爲가 있다.........
- <地上의 詩>에서
<地上의 詩>는 성경구절의 인용-‘太初에 말이 있느니라’로부터 시작한다. 이 경우 ‘말이 무엇인가는 한 가지의 의미로 포획할 수 없는 인간의 원초적인 영혼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점에서 시는 언어로 표현하지만 그 언어는 명백히 언어 이전의 언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또한 그 시어 속엔 인간 행위의 모든 것이 포괄된 광범위한 언어의 증폭이 담겨 있어야 함도 물론이다. 산문의 언어와 시어가 그 본래적 기능에서 다름인 것은 시어는 우주를 담고 있는 영혼의 대상인 데서 묘사라는 지상의 사물을 그리는 산문과는 다르다. 말과 행위는 분리가 아니라 육화되고 틈새 없는 언어의 결합-상징의 숲을 만들어야 한다면, 임화가 말한 ’자유로 번역할 수 있는 기능‘이라는 자유 속에 시적 허용을 이해하고는 있다. 그렇다면 임화의 시는 왜 난삽하고 조악하고 볼품없는 폐품 진열장을 바라보는 느낌일까? 임화는 알고 있는 것과 현실의 조화에 미숙했던 점이다. 시적 진실이 시인의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 앞에 맹목이었기 때문에 삐걱거리는 언어의 좌판을 벌리고 정치적 호객행위를 일삼았지만 손님들은 모여들지 않고 외면했을 뿐이다. 이점이 임화 시의 비극적인 또 하나의 표정이다.
4. 이념의 옷
詩는 상징이라는 바다를, 더는 광막한 우주를 상대로 창조의 숲을 이루어 내는 작업이다. 인간의 예술행위 중에 가장 커다란 - 하느님 다음 가는 창조자로서의 지위는 시인이 하려는 의도에 한계가 없는 영역과 제한할 수 없는 행위의 자유성에 특징이 있다. 시인이 시에 대한 관심은 광막한 우주적인 본질 앞에 눈을 번뜩인다. 그가 노리는 대상은 인간의 잡다한 감정에서 우주의 생성에 이르기까지 무한의 소유자가 된다는 데 자유인이고 주제자로서의 영광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일인 이데올로기조차 시의 부분이 된다.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고정된 생각이다. 불변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상황에 따라 변모한다. 한 곳에 시인의 눈이 집착되어 있다면 그 시인은 답답한 노래에 식상하게 된다. 바로 임화는 편협한 역사의 눈을 가졌기에 또 다른 실패의 간판을 달게 된다. ‘春園이 민족을 위해서 쓴다는 시나 임화가 계급을 위해서 쓴다는 시가 다 시로서 실패한 것은 둘 다 불순했기 때문’이라는지적은 자기의 생각, 자기의 사고(思考)를 행동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행위를 모방하려는 데서 파행의 결과를 만났던 것이다. 편협한 이데올로기가 시인의 정신영역을 구속할 때 그 힘은 시인의 자유를 구속하게 된다.
侵入하는 모든 敵에게/ 殘忍한 運命을 선사하고 / 발자욱마다를 /野獸들의 피의 또랑을 맨들자.
- <우리들의 戰區>에서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임화는 시의 언어를 몰랐던 데서 시라는 얼굴을 대면하려 했기 때문에 장광설을 늘어놓고, 그것들을 분단(分段)하면 시가 되는 걸로 착각했다. 시가 선전문구가 아니라는 생각보다는 시로서 詩 외에 도구를 삼으려는 불순한 행위 때문에 파탄의 문 앞에 이른다. “어딘지 복수적인 정열이 긴축된 표현을 향해 노력하고 있는”이라고 지적한 朴龍喆의 말은 정확한 안목으로 보인다. <우리들의 戰區>는 70년대와 80년대를 사납게 휩쓸었던 이른바 ‘民衆’의 원조격의 표정이 임화시집『讚歌』의 표정이다. 임화의 시는 해방 전보다 후에 와서 완전히 표변해 버린다. 주로 행사시이거나 투쟁을 선동하는 목적의 도구로 전락된다.
‘敵’이 모두의 적이 된다는 어설픈 표현이나 ‘야수들의 피의 또랑’이라는 언어는 확실히 시어가 아니라 정치적 구호의 핏발선 투쟁언어이다. 예술은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의 차이를 갖는다. 어떤 예술 기능이든 분리했으면 통합을, 적대에서는 사랑을 부르짖는다.
휴머니즘이라는 말은 예술이 혹은 예술 이외의 인간사가 이룩해야 할 궁극적 목표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치라는 공학조차도 인간의 사랑을 이룩하려는 데서 벗어난 행위가 아니다. 시어가 적개심의 도구로 바뀌어질 때 메마르고 삭막한 표정을 연출하게 된다면 그 또한 참혹한 비극이다. 이는 詩精神(poetry)의 착각이고, 시에 대한 파괴가 된다. 임화는 잘못 들어간 시의 길, 그것을 차라리 던져버리고 문학이 아닌 세계로 뛰쳐나갔어야 했지만 끝내 문학인의 세계 속에 살려는 생각 때문에 개성 결핍의 황당한 모순을 짓이기며 살아왔다.
晝夜로 放送되는 /南部朝鮮/ 더러운 하날에/무슨 旗ㅅ발이 /날리고 있느냐
- <旗ㅅ발을 내리자>에서
아아 나의 눈은 핏발이 서서 감을 수가 없다.
- <나의 눈은 핏발이 서서 감을 수가 없다>에서
임화는 해방과 더불어 사실상 시의 곁을 떠난 인상이다. 붉은 군대를 찬양하는 환영사를 시의 이름을 빌어쓰기 시작했고, 그런 일을 정치적인 상황과 꿰맞추기에 퍽 바쁜 생활을 보낸 듯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해방 이후에 쓴 시는 거의 삭막한 상황묘사에 언어의 기능이 더욱 살벌한 생각으로 채워져 있다. <꼴프場>은 계급의 격차를 가진 자와 갖지 않은 자로 대립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딱! 모진 소리가 까만 저 끝에서,/ 푸른 하늘의 波紋을 일으키며 올려온다./ 길다란 카부가 끝나자/ 패랭이의 분홍꽃, 크로바의 긴 줄기,/ 모두다 사태에 밀리듯 쓰러지며,/ 너희들은 사냥개처럼 풀밭 위를 뛰어간다./ 뒤 이어 짜그르르 끓는 손벽 소리에 섞여,/ 新女性의 外國말이 고양이 소리처럼 날카롭다./ 참말 등(藤)나무 시렁 밑이란 무척 시언하렷다.
- <꼴프場>에서
시가 언어경제 혹은 응축의 예술이란 말은 비단 시어의 길고 짧음만을 지정하는 뜻은 아니다. 사회를 혁명화 노동계급화의 역할로 문학을 이용하는 사회주의 이념으로 보면 13연으로 된 <꼴프場>은 임화의 시 중에서 비교적 성공한 작품이다. 아울러 그가 생각하는 관념의 일단인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이원성을 골프장 풍경을 내세워서 비교적 이해의 감도가 쉽게 접근되고 있다. 골프를 즐기는 월천군과 그를 따라온 新女性이 교태를 부리고-이들은 이른바 부르주아로-골퍼가 공을 초원으로 처내면 캐디가 사냥개처럼 공을 주워오기도 하고, 또한 캐디의 이마에 공이 맞아 슬픔에 젖는다. 드넓은 초원은 어찌 보면 비능률적이고, 죄악처럼 보인다. 마르크시스트는 기존 사회의 생산관계가 전체를 결정한다는 원리에서 가치를 마련한다. 임화의 ‘왜 이렇게 넓은 곳에 곡식을 심지 않았을까?’라는 시인의 생각은 소박한 그러면서도 당연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임화는 소박한 이데올로기의 무지개에 포로가 되었을 뿐이다. 이른바 사회주의에 문학 발전의 역사는 인민의 이해 관계를 반영하는 반동문학과의 투쟁으로 바라볼 때 예술성과 휴머니티를 버리고 이념의 앙상한 포로가 된다.
유물론적인 변증법은 혁명의 변증법으로 귀결될 때, 프롤레타리아는 결국 ‘도구’에 이르게 되고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는 프롤레타리아를 생산의 도구에 충실함을 강요하는 또 다른 조직 속에 부속품이 되어야 한다. 임화는 입구만 보았지 끝을 보지 못한 소박한 프롤레타리아 옹호자였다. 이런 미숙한 판단 때문에 1953년 8월 북한 당국이 날조한 간첩죄와 반당 분자로 몰려 사형 당하게 된다. ‘목화 짜는 기계는 목화 짜는 기계이지만 특정 상황 속에서는 자본이 된다.’는 말처럼 골프장은 비생산적인 곳처럼 보이지만 그곳이 생산의 충전을 위한 장소가 된다고 볼 때, 골프라는 행위는 비난받아야 할 곳은 아니지만, 일제치하(日帝治下) 그것도 보리고개 아래 신음하는 당시 사회 상황에서는 비난과 질타의 대상이 됨직 함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는 한쪽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편견이 저지르는 독단은 죄악이다. 이점에서 편향된 이데올로기는 문학성을 놓치고 삭막한 공허 속에 떨어질 염려가 된다. 한 가지 예로 마무리 한다.
입센의 페르 긴트(Pear Ggynt)에서 늙어가는 페르 긴트는 양파껍질을 벗기면서, 쾌활하게 각각의 껍질들과 자신의 삶의 시기와 비교하고 있는데, 결국에는 양파의 속과 자신의 성격의 핵심에 다다를 것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껍질이 있고, 삶의 일정한 시기 다음에는 역시 일정한 시기가 올 뿐, 중심은 보여지지 않았다. 이 예는 물신이 만들어지는 세상에서 모든 삶이 타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는 만큼 모든 삶에는 의미가 있다는 사고(思考)로 전환하면, 나를 고집하는 메마름에서 더 큰 나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했지만 임화의 도그마는 훨씬 넓은 세계를 확보할 수 있었을 기회를 놓치고 얕은 물에 스스로를 담궈버린 또 다른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어떻든 문학을 사회의 혁명화 노동계급화의 역할로 이용하는 사회주의 이념으로 보면 <꼴프場>은 비교적 성공한 작품이다.
5. 종로 네거리 그리고 바다와 길
1) 바 다(江)
바다는 한 방울의 물방울이 모여서 광대무변한 세계를 이루었지만, 인간은 한 방울의 물에서는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넓고 푸른 바다에서는 압도당하고 경외(敬畏)의 마음을 가지면서 마치 이상 세계의 이미지로 형상화 시킨다. 물은 생명의 본질이면서 길을 만들어 나간다. 작은 길에서 넓이로 혹은 넓이에서 작은 길로 바라보면서 그 흐름 속에 살아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부여하여 강물에 대한 속성을 이어간다. 인간은 넓고 푸른 바다를 바라볼 때 심원(深遠)하고 높은 이상(理想)을 꿈꾸기도 하지만 격랑과 파도에는 무서운 공포를 공유(共有)하기도 한다. 그러나 태내 양수에서 생명을 키우기 때문에 물은 삶의 고향이라는 생각을 갖기도 한다. 어떻든 물은 길을 만들어 인간에게 교훈을 제시하기도 하고, 인간의 문명을 이루는 수로를 따라 역사의 교훈을 배우기도 한다. 임화의 시에 바다는 현해탄을 건너는 데서 기억의 잔상(殘像)을 심화시키고 있다. 1938년 상재(上梓)한 그의 첫 시집인 『현해탄』후서(後序)에는 바다의 이미지에 특별한 자기의 생각을 담으려는 의도(意圖)를 기록하고 있다.
玄海灘이란 題 아래 近代 朝鮮의 歷史的 生活과 因緣 깊은 그 바다를 중심으로 한 생각, 느낌 等을 約 二三十篇 되는 作品으로 써서 한 冊을 만들어 볼가 하였다.
이 가운데 맨 뒤에 실린 바다가 많이 나오는 一聯의 作品이 그것이다.
임화가 현해탄을 건너면서 느낀 감회는 많았을 것이다. 더구나 근대 지식인은 한결같이 현해탄을 건너면서 그들의 역사적 사명과 꿈을 일구었기 때문이다. 또한 동양적인 폐쇄의 문을 열고 서양 문화의 새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출발이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서 비롯될 수 있었기 때문에 <바다의 讚歌>로부터 접하려는 새로운 세계는 과거와의 결별이면서 새로운 의미역을 확보하는 분수령으로써 바다가 설정되었던 것이다.
임화 시의 특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에서 새로움을 찾으려는 점을 내장하고 있다. <세월>은 바다에서 역사의식을 담으면서 창조의 본질이 담겨있는 곳으로 이해하고 있다.
시퍼렇게 흐르는 노들 강,/ 나뭇가지를 후려꺾는 눈보라와 함께/ 얼어붙어 삼동 긴 겨울에 그것은/ 살결 센 손등처럼 몇 번 터지고 갈라지며,/ 또 그 위에 밀물이 넘쳐/ 얼음은 두자 석자 두터워졌다.// 봄!/ 부드러운 바람결 옷깃으로 기어들제,/ 얼음판은 풀리고 녹아서,/ 돈짝 구들장 같은 조각이 되어 황해바다로 흘러간다.
- <세월>에서
江이라는 이미지가 흐름으로 살아, 겨울의 긴 세월에 얼음의 켜를 쌓으면서 역사의식을 높이고, 다시 이것이 봄이 되면 풀리고 녹아 황해바다로 이어진다. 江에서 바다로 전진할 때 시간의 유장한 흐름이 시공(時空)을 채우고 시공은 다시 반복하면서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또 모든 것이 허무러진 곳에서 생명의 싹은 터져온다. 그리하여 ‘너는 언제나 얼음장 같이 냉혹한 품안에/ 이 모든 것의 차례를 바꿈 없시/ 담뿍 기르며 흘러 왔다.’에 이르러 역사 속에 삶의 의미를 생성(生成)하고 있다.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조건이다. 서양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생각한 데 반해 동양적 자연관은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삶의 원리를 터득했던 자연관으로 우주의 교체 원리를 터득했던 일종의 순응이었다. 즉, 계절의 교체, 주야의 교체 등의 순환운동이 곧 역사의 반복현상으로 이해되는 순명(順命)사상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어떻든 임화는 세월 속에 역사의 순환을 믿고, 또 그 속에서 미래와 사랑과 함께 영원을 이식하려 한다. ‘미래여! 사랑하는 영원이여!/ 세계의 모든 것과 함께 너는 영원히 젊은 우리들의 것이다.’처럼 세월 속에 영원한 표상을 만들려는 임화의 생각은 젊음이 지속하는 에너지의 충전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을 때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것이 바다가 된다. 바다를 중심 테마로 다룬 작품은 <옛 冊>, <江가로 가자>, <하늘>, <最後의 念願>, <너 하나 때문에>, <洪水뒤>, <海浹의 로맨틔시즘>, <다시 인젠 星座가 蒼空에 잇슬必要가 없다>와 <바다의 讚歌>가 있다. 1938년에 출간된 『玄海灘』에 <바다의 讚歌>는 다시 1947년의 『讚歌』에도 중복되어 게재되어 있다. 그러나 ‘바다야!/ · / · / ·’가 <讚歌>에서는 ‘바다여/ 너의/ 가슴에는/ 思想이 들었느냐.’로 삽입되어 있다. <너하나 때문에>는 바다에서 삶의 시험을 느끼게 하고 <하늘>엔 바다와 하늘이 동가(同價)로 초점을 맞추고 <洪水뒤>에선 추억을 느끼게 한다. <海浹의 로멘틔시즘>은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서 지식과 꿈을 배워 ‘별’이 되고 싶어 하는 젊음의 야망이 그려져 있다. <江가로 가자>에서는 역사의 거센 물가로 가자는 권유를 하고 있어 역사 극복의 가냘픈 의지를 보이고 있다.
지금/ 우리들 靑年의 世代의 괴롭고 긴 歷史의 밤,/ 검은 구름이 비바람 몰고 怒한 물결은 山더미 되어,/ 悲劇의 검은 바다 위를 달리는 오늘/ 그 미덥던 너도 돛을 버리고 닷줄을 끊어, / 오직 하늘과 땅으로 소리도 없는 絶望의 슬픈 노래를 뜯어,/ 가만히 내 귓전을 울닌다.
- <옛 冊>에서
밀치고, 또 /박차고 하면,/급기야 나는 /最後의 항구로 외로이 /돌아오지 않는 손이 되리라만,
- <最後의 念願>에서
그러나 오늘날 얼굴의 /깊은 주림과 꺼진 눈자위가 /밤 하늘보다 오히려 어두워,/ 타고있는 조그만 배가 /장차 닿을 항구의 이름조차 알수가 없다.
- <다시 인젠 天空에 星座가 있을 必要가 없다>에서
시는 감정의 거리(距離)조정이다. 대상 혹은 경험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 볼 때 감정의 초점은 선명해진다. 초점이 맞아야 함이 좋은 사진으로서의 일차적 조건이 된다. 감정의 여과가 되지 않는다면 격정과 격랑으로 침몰된다. 임화는 그런 시적 원리를 터득하지 못한 데서 불행한 시인이다. 바다를 대상으로 한 작품에서도 바다에 대한 통찰이 없이 관념을 언어로 붙잡아 통사정하는 격이 되었다. 어떻든 임화의 바다는 불안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바다가 Metamorpbose가 되면 세월이 될 수도 있고, 하늘이 될 수도 있다. 임화의 정신은 어디에도 일제에 대한 증오의 시어가 포착되지 않고 일제가 만든 세월에 불안의 징후가 짙게 보일 뿐이다. 이로 보면 <옛 冊>이나 <最後의 念願> 등에 바다는 절망과 불안의 검은 옷을 입고 허덕이는 느낌을 준다. 이는 일제치하를 살아가는 젊은 청년으로 좌표를 상실한 데서 오는 암시로 볼 수밖에 없다. <다시 인젠 星座가 蒼空에 잇슬필요가 없다>엔 배에 탄 사람이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암울한 절망의 중심에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다. 어둠을 뚫고 극복해야 할 청년이 오히려 기백을 잃고 탄식과 불안과 절망의 비탄에 젖어 민족의 희망을 지워버리는 행위가 옳은 역사적 책임인가는 문제가 있다. 역사를 이끌어 새로운 곳을 향한다는 의지에 젊음의 본질이 있다면 임화는 어둠에 삼키워진 절망 환자로서 재생불능의 중환자이다.
2) 길
길은 문명으로 통하고, 인간 삶의 모두가 이룩되는 개념을 갖는다. 휫트먼의 <Song of The open Road>는 삶의 길과 실제의 길을 상충시켜 인생의 의미를 깨우쳐 주었고, 老子나 莊子의 道는 정신세계의 지고(至高)함을 일깨워 주었으며, R. Prost는 길에서 고뇌에 찬 선택을 고민했다. 땅 위에 길이든, 바다 혹은 하늘의 길이든, 죽음의 길이거나 인간의 숙명과 맞닿아 있어 현실의 길과 사차원(四次元)의 길로 계기성(Sequance)을 갖는다. 인간은 길을 가는 운명이기 때문에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가 될 때 엄숙한 생각으로 돌아간다. <메밀꽃 필 무렵>은 길에서 스토리가 전개된다. 金廷漢의 「묵은 자장가」는 소외공간으로의 길이 나타나고, 金東仁의 <배따라기>엔 이데아를 찾는 상징공간으로 길이 나타나고, 申瞳集의 시에 길은 돌아가는 길로 채워져 있다. 임화는 길에서 시적 중심을 잡으려 한다. 바다 역시 그런 흔적이다.
호올로 도라가는/ 길가에 밤비 차거워/ 거름 멈추고 도라보니/ 會館 불빛 멀리 스러지고/ 집집 門은 굳이 잠겨/ 길이 멀어 외로운가
- <길>에서
죽은 동무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시(獻詩)가 <길>이다. 자폐의식이 가득하고, 고독과 외로움이 스며있어 시인 자신의 생각이 이입(移入)된 듯이 보인다. <행복은 어디 있었느냐?>에서도 ‘돌아갈 집도 멀고,/ 걸을 길도 아득한/ 나의 젊은 마음아.’에서 임화의 길은 암담한 어둠과 피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임화 시에 가장 득의로운 생각은 <네거리의 順伊>를 꼽을 것 같다. 이는 시집 후서에도 ‘<네거리의 順伊> 한편으로 그 때 내 정신과 감정생활의 전부를 이해해 달라 함은 좀 유감되나’로 기술한 것을 보면 임화 자신이 시인으로서의 생각- 계급문학적 경향에 가장 근사(近似)한 성공일 수 있는 평판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네거리의 順伊>와 <다시 네거리에서>와 『讚歌』에 <九月 十二日>, 세 작품은 연작 형태의 시로 한결같이 비탄과 서러움을 종로 네거리 길을 통해 담고 있다. <九月 十二日>은 부제(副題)로 ‘-一九四五年, 또다시 네거리에서-’를 달아 ‘부끄러운/ 나의 生涯의/ 쓰라린 記憶이’를 시발(始發)로 해서 서울 거리에 수많은 사람과 누이의 얼굴, 감방에서 죽어간 친구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담담히 회고조의 비탄에 젖는다. 비교적 시적 기교가 스며있는 절실성을 전달하고 있다.
네가 지금 간다면 어디를 간단말이냐?/ 그러면, 내 사랑하는 젊은 동무,/ 너,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順伊,/ 너의 사랑하는 그 귀중한 사내,/ 근로하는 모든 女子의 戀人...../ 그 靑年인 용감한 사내가 어디서 온단 말이냐?// 눈바람 찬 불상한 都市 鐘路 복판에 順伊야!
- <네거리의 順伊>에서
서사적인 형태의 <네 거리의 順伊>는 1연에 상황의 제시, 2연엔 가난 속에 어머니를 여읜 오누이의 근심과, 사랑하는 청년이 나타난다. 3연엔 ‘거리에서 만나 거리에서 헤어지는’ 청춘의 즐거움을 갖는다. 4연엔, 노동하는 소녀의 애인인 청년이 ‘너도 잘 알고 나도 잘 아는 멀쩡한 事實’로 하여 어딘가로 가버렸다. 5연엔 젊은 戀人 청년은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로 보아 4연의 이유 때문에 감옥에 있음을 암시한다. 6연엔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 네 사내를 위하여,/ 또 근로하는 모든 女子의 戀人을 위하여.......’내일을 향한 집념을 보인다. 마무리 7연엔 ‘이것이 너와 나의 幸福된 靑春이 아니냐?’로 시적 토운을 마무리한다. 종로 네거리 길에서 순이와 청년 그리고 순이의 ‘하얀 오빠’가 중심을 이루고 가난과 슬픔이 배경을 만들어 <네거리의 順伊>는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 골목으로 들어간 사람이 무엇으로 변용되어 나와야 한다면 임화의 시엔 그런 요구에 답안이 없다. 길은 시의 모든 사건의 Sequence를 이루면서 출발하고, 네거리에서 존재론적 변화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미래지향에로의 꿈을 상상하게 한다.
간과할 수 없는 시적 자아는 순이가 된다. 일본에서 서양문물에 접한 임화로서 ‘순이’라는 가장 토속적인 이름을 등장한 데는 여전히 가장 한국적인 생각을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영이와 순이라는 이름은 때묻지 않은 우리의 누이요 동생이라는 느낌을 낳고 있기 때문에 여리고, 연약하고, 울음이 많은 여인상이면서 순박한 어머니와 닿고 있는 이미지가 된다. 이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보통명사로 순수한 한국 여인이라는 생각이다. 薛貞植에 <順伊의 노래>나 장만영의 <달, 포도, 잎사귀>에 순이도 특수한 명칭이라는 생각은 갖지 않고 민족적이고 토속적인 한국 여인임을 암시하고 있다.
임화는 종로 네거리와 가장 한국적 여인을 등장시킴으로 외세에 짓밟힌 민족의 처참한 상황을 제시하려 하고 있다. 일제의 검열이라는 올가미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강렬한 시어(詩語)의 회피는 급기야 완만한 상황으로 ‘순이’라는 이름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순박한 순이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것이고, 한국의 젊은 청년은 무고하게 감옥에 들어갔다면 이런 상황을 만든 자는 네거리를 장악한 외세(外勢)라는 상상이 가능해진다. 종로 네거리는 토속적이고 가장 한국적인 것이 용해된 거리이면서 역사의 흔적들이 이루어지는 곳이면서 서울의 중심이요, 민족의 심장으로 생각되기에 임화 시에 江과 같은 이미지를 종로 네거리에서 상상한다. 이 거리엔 문명이 교차하고, 영욕이 번갈아 다가든다. 임화는 <다시 네거리에서> 회고에 젖는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확신이 넘치기 보다는 침착하게 지나간 시절을 되돌아보는 토운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願컨대 거리여!그들 모두에게 전하여 다오!/잘 있거라! 고향(故鄕)의 거리여!/그리고 그들 청년들에게 은혜(恩惠)로우라/지금 돌아가 내 다시 일어나지를 못한채 죽어가도/불쌍한 도시(都市)!종로(鐘路) 네거리여!사랑하는 내 순이야!/ 나는 뉘우침도 부탁(付託)도 아무것도 유언장(遺言狀)위에 적지 않으리라
- <다시 네거리>에서
일제라는 상황은 민족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더구나 대륙침략의 전초(前哨)로 만주사변을 일으켜 일본의 소위 군부독재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이어 1933년 일본은 국제연맹의 탈퇴와 더불어 파시즘의 냉혹한 시대로 접어들었으니. 3.1운동이후 문화정책에서 무단철권정책으로 탈바꿈하면서 제반 언론은 검열되었고, 헌병 경찰의 엄중한 감시 하에 암흑정치의 막이 올랐던 때가 1930년대였으니,1931년 제1차 KAPF의 검거,1934년 제 2차 KAPF 검거와 해산이라는 소용돌이를 겪었던 와중(渦中)에서 노출된 표현 보다는 오히려 안으로 움추러 드는 시의 표정에는 패배와 어울려 체념이나 혹은 현실외면의 방법이외엔 없었다.
임화의 길은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이 어쩔 수없이 숨어드는 체념과 무력한 현실도피의 방향으로 통로를 설정한 것이 종로네거리의 슬픔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다시 일어나지를 못한채 죽어가도’에서 네거리는 생기와 활기를 잃었을지라도, 뉘우침이나 부탁도 적지 않겠다는 ‘유언장’의 암시에서 임화의 생각은 현실을 외면하는 나이브함만은 아닌 것 같다. 이같은 생각은 ‘비록 잠잠하고 희미하나마 내일(來日)에의 커다란 노래를/그들은 가만히 듣고 멀리 문(門)밖으로 돌아가겠지’에서 희망과 미래를 암시하는 자존(自尊)과 의지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6. 실패한 표정
임화의 시는 시에 투사하는 정열보다는 오히려 문학단체를 조직하여 투쟁의 문학이나 이념대립의 목적으로 시의 옷을 빌려 입었기에 그 가 쓴 시 속엔 정치(精緻)한 시적 질서라거나 언어의 조탁(彫琢)이나, 상징의 기법은 도외시 되어있다. ‘안으로 열(熱)하고 겉으로 서늘하기’를 주장한 정지용의 표정과는 달리 안으로 공허하고 밖으로 소란스러운 말의 행진에 열중한 것이 임화의 시가 실패한 첫째 표정이었다. 이에 대해 정지용은 다음과 같이 꼬집고 있다.
시인은 배우보다 다르다. 그처럼 슬픔의 모방(模倣)으로 종시(終始)할 수있는 동작의 기사(技師)가 아닌 까닭이다. 시인은 배우보담 근엄(謹嚴)하다. 인생에 항시 정면(正面)하고 있으므로 괘사를 떨어 인기를 좌우하려는 어느 겨를이 있으랴. 그러니까 울음을 배우보다 삼가야 한다. 감격벽(感激癖)이 시인의 미명(美名)이 아니고 말았다. 이 비정기적 육체적 지진 때문에 예지(叡智)의 수원(水源)이 붕괴(崩壞)되는 수가 많았다. 정열이란 상양(賞揚)하기보담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관료(官僚)가 지위에 자만하듯이 시인은 빈핍(貧乏)하니까 정열을 유일한 것으로 자랑하던 나머지에 택없이 침울하지 않으면 슬프고 울지 않으면 히스테리칼하다
정지용의 시에 대한 위의(威儀)는 임화의 시에 대한 적합한 조언이다. 시의 언어가 무용이고 산문의 언어가 보행이라는 P.발레리의 말을 대입할 필요도 없이 시는 상징과 비유라는 데서 산문의 묘사와는 같을 리가 없는데 임화는 이런 기초적인 시작(詩作)에 대해 정서의 균형감각을 지적(知的)으로 처리하지 못했기에 눈물 많은 3류 배우가 되어 버렸다. 그 감정과잉의 예로 시집『현해탄』엔 !가 216개를 사용, ?는 무려 164개나 된다. 이런 경우는 감정의 절제가 없는 센티맨탈의 전형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이는 시적 리듬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런 현상은 오오라는 감탄사의 범람에서도 시적인 위의(威儀)와는 다른 길로 들어갔다. 또한 <주리라 네 탐내는 모든 것을>은 무려 20페이지 219행으로 !는 35개 ?는 10개를 사용하여 격렬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결말을 낳았다. 이런 예를 종합하면 김동석이 ‘산문을 짤러서 시 모양 늘어놓은 시집 아닌 시집이다’는 지적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시인은 모국어의 수호자이면서 언어미감의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와는 너무 무지함을 나타냈다. 즉 한자 敗北(패배)에 대한 발음이 ‘敗北과 승리(勝利)’<암흑의 정신>,‘敗北이 죽도록’<너 하나 때문에>로 사용한 무지는 국어에 대한 기초 지식이 전혀 없는 듯이 보인다. 또한 시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시인이 되고자 했던 임화는 어둠에서 길을 잘못 들어 방황한 궁극적으로 시의 옷을 빌려 입고 정치적인 모습을 연출한-어디에도 적합하지 않는 사람-실패(失敗)의 표본같은 불행한 일제치하의 시인이다.‘시인으로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는’ 김윤식의 지적은 오히려 임화의 시적 표정을 더욱 당황과 혼란으로 얼버무린 느낌이다.*
*본고는 졸저『해금 시인의 정신지리』(느티나무)에 소재한 논문을 재수록함
■ 채수영
문학평론가. 전 신흥대 교수
[제10회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세미나 발표자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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