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도 훨씬 넘는 옛일이다.
글쓰기를 배우겠다고 원고지 한 묶음을 가지고 수유동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수필의 대가인 K선생은 이리저리 훑어보시고는 엉뚱하게도
“앞으로 두고 보게나, 글 속에서 늙은 냄새가 난다고 말들을 할 거야. 왜 그러느냐고 나에게 묻지 말고 두고두고 새겨가면서 글을 써 보게나. 그러면 어느 날
인가 그 까닭을 알게 될 테니….”
말대로 글이 늙는다는 것은 글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 뒤로 나는 이 말을 항상 머릿속에 담아 두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글들을 써 왔다.
글이란 무한한 자기 생각을 유한한 글자로 늘어놓아 바깥으로 나타내는 행위이기에 사람에 따라 나이에 따라 그가 소속된 집단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지만, 이래저래 나이가 지천명을 지나 60을 넘어가니 내 글도 나이가 드는지 모른다.
하긴 두어 달 전 K선생의 말을 실감케 된 일이 있었으니 만각이라고나 해둘까?
종로거리를 거닐다가 후배 L군을 만나 커피잔을 앞에 두고 세상잡사를 주고받다가 글 이야기로 옮겼다.
“선배 글을 가끔 월간지 속에서 대하게 됩니다만 읽고 나면 뒷맛이 개운치 않고 중압감 같은 것을 느낄 때도 있어요. 글 속에서 새로움도 향기도 나지 않는다고나 할까? 구닥다리 같은 고루한 생각만이 가득하니까 읽을 맛이 없어요. 진취적이었으면 좋을 텐데….”
“그래 고마워. 그럼 어떻게 써야 진취적이고 구닥다리 소리 안 듣지? 알려주게. 글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니….”
나는 그의 말 속에서 무엇이 진취적이고 무엇이 구닥다리 같다는 건지 그 기준을 어디에 두고 하는 말인지 따지지는 않았다.
“간단해요. 요즘 세상 돌아가는 물정에 눈을 돌리세요. 모든 사람들 특히 젊은이 쪽에 관심을 두고 그네들의 인생관, 출세관, 이성관에 스포츠와 연예인들의 최근 소식을 알아두고 이것을 바탕으로 글을 써 보세요. 한마디로 생기발랄한 글을 쓰세요. 우리들의 눈귀를 모았던 문제작들은 한결같이 충격적인 것들이었지요. 요즘 글 쓴 사람들은 유치하고, 사상 쪽보다는 젊은이의 말초신경들을 겨냥하고 썼기에 많이 읽혔어요. 색기, 음기, 요기가 가득 했지요. 선배는 이런 긴 글(소설)은 안 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시류(時流)에 맞는 글은 팔리거든요. ‘HOT’에 ‘영턱스’에 ‘SES’에 ‘전이경’이 누군지 아십니까?”
무엇이건 모두 알고 있어야 좋은 향기 나고 맛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그의 논법이다. 들어둘 만 했다.
자랑은 못 되지만 지난 78년 처음 출간한 수필집 이색찻집을 보고는 너무 딱딱하다 조금 부드럽게 썼더라면… 하고 아쉬워들 했다. 이 버릇을 못버린 채 88년 수필집 꼴뚜기 인생에서도 그랬고 앞으로 나올 수필집 21세기의 주당멕이에서도 천편일률, 이 투이니 어찌하랴!
30년 전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사람의 정신문명에서나 기계문명에서도 상상 못할만큼 달라졌으니 내 글도 달라져야 한다는 당위성은 시인하나, 막상 펜을 들면 말을 듣지 않는다. 독자도 의식해야 한다지만….
사실 지하철, 찻집, 공원 같은 사교의 광장에 나서 보면 온갖 ‘옐로페이퍼’지가 판을 치고 있다. 독자들의 마음을, 삶을, 지성을 풍요롭게 보탬해 주는 글들이 아니다. 독단(獨斷)하고 싶다. 읽는 쪽보다 보는 쪽에 가깝다. 풋풋한 냄새는 날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매사 이런 생각도 났다.
오늘 아닌 옛날에 살았던 우리 선인 특히 문인들은 어떤 글을 썼나 하고.
지금 내 서가 한쪽에는 옛날 책들이 가득 차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아끼는 책은 75년 정음사에서 펴낸 『李陸史全集』이다.
포도원 가득히 푸른 포도알들이 주저리주저리 알알이 익어 가는 오뉴월이 되면 ｢청포도｣란 시가 생각나 꺼내 읽으면서 싱그러운 청포도를 먹곤 했다.
특히 수상집 열두 편을 읽어 보면 모두 줄줄 물 흐르듯 막힘없이 써 내려간 유려(流麗)한 필치에 지금부터 60년 전에 쓴 글 속에서 나이듦을 찾을 길은 없었다.
오히려 젊은 기백이 넘실대고 있다. ‘다만 나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을 따름이오, 행동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 詩를 생각한다는 것도 행동이 되는 까닭이고’이라고 수상문 ｢계절의 요행｣에서 말하고(쓰고) 있었고 선생의 문학관을 해설한 김학동 교수(서강대)는 ‘일제의 학정에 의한 칼날같이 가혹하고 절망적인 현실, 불가항력적인 긴박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육사에게는 행동의 연속만이 있었고….’ 하여 그의 문학 세계를 말하고 있어 육사의 글 어디서도 나이든 늙은 맛을 찾을 길 없었다.
다만 문단을 기웃거리며 서성대고 있는 처지에 있는 내가 육사의 글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하고 용훼하는 것은 송구스러울 뿐이다. 허나 글이란 그가 쓰기 나름이지 나이와는 상관없음을 느꼈기에 여기 소개해 보았다.
L후배가 나에게 한 말은 나이가 들면 원숙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한 내 탓이라 치부해 두면서도 그에게도 이육사의 글을 읽고 그 속에서 나이듦을 찾을 수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상품에는 각기 팔려나갈 가격이 꼭 하나 있다는 일물일가(一物一價)의 원칙처럼, 다시 말해 글도 사진기와 같아서 똑같은 피사체라 하더라도 촬영자가 어디만큼 구도를 잡고 얼마 떨어져 얼마의 속도로 셔터를 누르냐에 따라 그 사진의 됨됨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글쓰기도 사진 찍기와 같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아오면서 접해 오는 사람들, 그리고 우주 삼라만상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내 생각대로 보탬 없이 써 왔기에 딱딱하다, 고리타분한 냄새가 난다는 말을 듣게 되는지 모른다.
누군 이런 냄새를 독자에게 안겨주는 여운으로 받아들여 철학으로 승화시켜 평가해 주기도 했지만 글 쓸 때는 나이듦도 딱딱함도 고려치 않고 내 멋대로 외고집으로 써 왔음이 사실이다.
‘글이란 누구나 글자를 알면 쓸 수 있다. 다만 눈으로 귀로 보고 듣는 것만으로는 남에게 어필(Appeal)하지 못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까지도 잡아내 쓸 줄 알아야 한다.’는 평론가 G씨의 글쓰기 ABC가 금과옥조가 되어 이 순간에도 내 귀를 때린다.
글을 쓸 때마다 젊어지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문투가 말을 듣지 않아서 탈이지만….
■ 최영종
수필가. 한국수필문학협회 이사
[수필집『참새의 눈물』(교음사 刊)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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