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국정]
내가 어쩌다가 글을 쓰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냈는지 알 수 없다. 글을 쓰는 데 무슨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쓸만한 '거리'도 없는 주제엔 글은 아무
나 쓰는 것이 아닌데.
내가 글을 써볼까 하고 생각해 낸 것은 무엇보다 그만한 시간이 남아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이유가 될까? 또한 앞으로 내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전에 내가 살아온 이야기들을 자식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어떨까 해서였다.
처음에는 지난 이야기들을 더듬다보니 제법 '쓸거리'가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 더 쓸 이야기가 없는 것 같다. 축적된 것이 별로 없으니 밑바닥이 쉽게 드러날 수밖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 짓이지만 일단 시작하고 보니 계속 써야지 하는 마음이 되어 무엇인가 계속 쓰려고 머리를 파보게 된다. 도대체 이런 글 나부랭이를 써서 무엇에 써 먹겠다는건지? 무슨 글다운 글이 생기며 누가 관심이나 갖고 읽어 준대?
만일 내가 글을 써서 단돈 몇 푼이라도 생길 수 있다면 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잘난 체하며 글깨나 긁적거린다고 우습게 보던 눈초리가 달라지겠지. 무슨 일이건 해서 돈이 나오는 일이라면 직업이고 프로가 되어서 가치 있는 일이라고 보는 세상이다.
모든 일의 가치 판단기준은 거기서 생기는 돈의 액수에 따른다. 돈이 많이 생기는 일일수록 가치 있는 일이 되고, 돈이 안 생기는 일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로 평가절하한다. 이쯤 되면 황금만능세상에서는 돈이 종교이며 신앙으로 전락하고 만다.
나는 본시 돈과는 인연이 멀다. 일생을 돈으로 인해 시달리고 고통을 받아 왔지만 그렇다고 돈이 제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돈이지만 전부는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니 돈이 따르지 않아 가족들을 고생시켜 왔다. 주위로부터 쓸모 없는 인간, 주변머리 없는 인간으로 낙인 찍혀 왔다. 말이 이상하게도 글 쓰는 일에서 돈 얘기로 벗나가고 말았다.
나는 내가쓴 글에 대하여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마 초등학생의 작문 정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적으려고 하였다. 미사여구나 수식어를 많이 사용하여 과장하고 싶지 않다. 있었던 것 그대로, 느낀 바를 솔직하게 표현하려는 것 뿐이다. 언감생심 남의 주목이나 찬사를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또 그럴만한 글이 못된다는 것을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글이라고 쓰다 보니 제일 난감한 것이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 표준말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해한 한글 맞춤법이다. 왜 이렇게도 어렵게 만들어져 있는지? 될 수 있으면 맞춤법에 어긋나지 않게 쓰려고 일일이 국어사전을 펴서 대조하자니 신경질이 날 지경이다. 도대체 이런 주제에 무슨 글을 쓰겠다고 덤벼드는지 나 자신이 우습게 보일 때가 있다.
나는 본시 한글에 대하여 기초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다. 보통학교 때 '조선어' 시간이 매주 한 시간 들어 있었지만 그 당시는 아무도 중요시하지 않는 과목이었다. 8.15해방이 된 후 우리글을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신문이나 책을 읽을 때, 특히 한글 맞춤법을 유심히 보아 왔다. 그런데 무슨 맞춤법이 그리도 자주 바뀌는지, 좋지 않은 머리가 더욱 혼란에 빠지게 한다.
그렇다면 왜 섣불리 글을 쓰려고 하는가 하면 할 말이 없다. 산에 오르는 사람에계 왜 그런 힘드는 일을 하는가 하고 물으면 "산이 있으니까"라고 대답한한다고 한다. 만일 누가 나보고 왜 서툰 글 나부랭이를 가지고 긁적거리는가 묻는다면 "시간이 있으니까"라고 대답하면 말이 될까?
한국에 있을 때나 미국 생활 20년이 된 지금이나 글을 쓰다 보니 글쓰는 일이 어느 정도 습관화된 것 같다. 시간이 있을 때 가만히 있자니 왜 내가 이러고 있나 해진다. 단 몇자라도 써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글 쓰는 데 있어서 어떤 강박관념 같은 것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래야만 하는 짓도 아닌데 습관이라는 것이 참으로 웃기는 것인가 보다. 나도 모르게 종이와 볼펜을 들고 앉아 있으니. 그런데 무슨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이 마음이 약간 불안하다. 옆에서 눈총을 쏘고 있어서일까. 그래서 못쓰는 글이 더욱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에서도 꼭 글을 써야 하는지.
이래저래 겨우 몇자를 쓰다 보니 하루 해가 다 지나간다. 그래, 오늘만 날인가? 내일도 있고 모래도 있는데, 하나마나 하는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그렇다면 나의 '자전에세이집'은 언제 나오지?
무슨 원고청탁을 받은 작가가 마감일이 당도했다고 독촉 받은 투이다. 꿈 깨어라, 현실과 환상을 분간도 할 줄 모르는가?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그래, 쓰는 데까지 써봐야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나는 오늘도 종이와 볼펜을 들고 앉아 멍청히 시간을 보내고 있다.
■ 엄국정
수필가. 미국 거주
[에세이집『미국에 살다보니』(경남 刊) 수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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