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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10월17일 10시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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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순 시인-생득적 허무주의로 일관한 생애
(원제)생득적 허무주의로 일관한 생애-東騎 李敬純 시인의 삶과 가족관계

[양왕용]

1. 해방 전 삶의 자취

동기 이경순 시인은 1905년 11월 11일 지금은 진주시로 통합된 진양군 명석면 외율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셋째 아들이자 태종 이방원의 바로 윗형인 방의 즉 益安大君 17대손으로 부 李弘濟씨와 모 白南星씨 사이의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구한말 궁내부
▲ 동기 이경순 시인
주사로 전국의 물레방아와  관개사업을 총괄하는 水輪院에 근무하다가 한일합방과 더불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의 집은 마을에서 천석꾼 소리를 듣는 부자였다고 한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그는 13세 때 장가를 갔다. 그러나 결혼 후 유복한 집안인 덕택에 진주 제일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한 후 부인을 남겨놓고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났다. 

삼일운동 직후인 그 때에 상투를 자르고 도일한 그는 1924년 4월 1일 동경의 사립 주계主計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대학 전문부 경제과에 진학하여 1927년3월 20일 중퇴한다. 이 시기에 특기할 사항은 1928년 고향 진주에서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5개월간 미결수로 감옥생활을 한 점이다. 

그의 회고기에 의하면 일본 어느 대학 2학년 되는 해에 일본 유인裕人천황 즉위식이 거행되기 한 달 전부터 사상이 과격한 한국 유학생을 예비검속하게 되어 그것을 피하여 친구이자 朴列 사건과 관련된 鄭泰成과 함께 진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동경농업대학 재학 중인 洪斗杓와 함께 문산면 청곡사에 체류하면서 시를 쓴다는 핑계로 아나키즘을 연구하다가 진주경찰서에 검거되었다. 홍두표는 곧 면소되고 동기 시인과 정태성은 진주교도소를 거쳐 대구 복심법원까지 가서 풀려났다. 

시인에게는 진주에서 검사가 징역 1년을 구형하였다. 그러나 판사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하였으나, 검사의 항고로 대구까지 간 것이다. 대구에서도 역시 무혐의로 무죄 판결을 받아 석방된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에는 적을 두지 않고 일본인 친구들과 한국 유학생 연합체인 <흑색청년연맹>, <자유연합>등과 교류하면서 아나키즘 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일본 문필가들과 교류하면서 아나키즘 문예평론지 <흑색전선>, <니힐>등에 글을 쓰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니힐리즘과 아나키즘의 방법론인 다다이즘을 체득하였으며, 시인 北原白秋를 찾아가 만나기도 하였다. 이러기를 여러 해 지난 1940년 시인 자신은 징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회고하고 있으나 그 당시 35세나 되는 나이로 미루어 볼 때 다른 복합적인 이유로 浦和市 東北치과의전에 입학하여 1942년 9월 22일 졸업한다. 그러나 이 치과의전 졸업장은 그를 해방직후 진주농림학교 축산과 위생교사의 길을 걷게 하였으며, 교직은 해방공간에서의 살아가는 경제적 방편이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적 감수성이 있어서 한문 서당에서 다음과 같은 한시를 창작한 기억이 난다고 회고하고 있다.

觀水逝無息 汪汪千萬聲 새겨보자면 흐르는 물을 보매 가고 다함이 없으니, 왕왕하며 우는 천만소리로다. 그러한 한문시 절구를 쓴 기억이 난다. 이제 보는 바와 같이 詩와 文도 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 어린 의식, 감정에도 막연한 無常感이 잠재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상과 같은 감수성은 일제강점기에도 시를 발표하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동기 시인은 해방 직후부터 시를 발표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다음과 같은 회고기가 그렇지 않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나는 하기 방학에 귀향해서 진주에 있던 金炳昊 씨(병호는 당시 東京서 발행하는 문예사상지 《문예전선》에 시를 기고하기도 했다.) 소개로 어느 일간지에 <百合花>란 제목으로 쓴 시편을 발표하고, 다시 東京으로 돌아가서 문학으로 살아가기보다는 문학을 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정신상황을 이루어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그해 東京 戶塚町 源兵街에 있는 사상단체 <黑友會>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래서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먼저 찾는 것이 이 나라에서 생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떳떳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되어서 20년을 동경에서 지냈었다.

그의 실질적인 처녀작인 <百合花>는 다만 그의 회고기에서 언급되었을 뿐이지 그동안 연구되거나 발굴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경남과 부산의 지역문학을 주로 연구하는 학술지 《지역문학》 10집에 이순욱 박사가 발굴하여, 동기 시인, 파성 설창수 시인, 조진대 소설가의 공동 작품집 《三人集》(1952.8. 영남문학회)에 대하여 ꡐ근대 진주 지역문학과 《三人集》ꡑ이라는 논문을 쓰면서 소개한 바 있다. 그 전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百合花>로 알려진 실제 작품의 제목은 <하얀 百合花>이며 발표지면도 조선일보로 1928년 10월 26일 자 4면에 게재되어 있다. 이 작품은 우선 표기법상으로 한글맞춤법통일안이 제정되기 이전에 발표된 것이기에 오늘날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고 띄어쓰기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의 전집에는 물론 수습되어 있지 않다.

이 작품은 시적화자 ꡐ나ꡑ를 꽃으로 단순이 비유하고 있는 점에서 그의 광복 이후의 작품보다 훨씬 난해하지 않다. 특히 주목할 만한 시적 세계관은 그의 무정부적  허무주의 사상이 전혀 보이지 않고 민족주의가 암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ꡐ시들어진 꽃ꡑ, 그것도 춤추는 나비와 노래하는 벌도 오지 않는 꽃은 1928년 그 당시의 식민지적 상황을 상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마지막 행에서 ꡐ다시 필 날이 있는 백합 꽃ꡑ이라는 비유는 동기 시인보다 훨씬 뒤에 창작된 이육사의 <꽃>을 연상시키는 상황의식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또한 1928년 그 당시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 보아도 크게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고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이 작품 발표를 계기로 시단 활동을 계속하였다면 그는 1930년대의 시인으로 시문학사에서의 위상이 달라졌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작품 활동을 중단한다. 그렇게 된 경위는 앞에서 인용한 동기 시인의 회고기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민족어로 자유스러운 정신상황에서 창작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자유 즉, 국권의 회복이 우선이라고 본 것이다. 말하자면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근 20년 동안 東京에서 아나키스트 운동 단체인 <黑友會>, <自由聯合>등지에서의 활동에서 무정부주의 이론을 배우고 동지들과의 공동생활을 통하여 실천한 것이다. 이때의 동기 시인의 아나키즘에로 경도된 모습은 그의 회고기 <그때 그 시절> 가운데 많은 부분(전집 pp.365-387)으로 언급되어 있다.

2. 해방 직후의 진주 시절

해방이 되자 동기 시인은 진주로 돌아와 1946년 8월 31일 진주농림고등학교 급2급봉 교사로 부임한다. 48년 10월 1일에는 교사 7의4급봉으로 승급하고, 50년 8월 31일에는 8호봉으로 승급하며 봉급은 33,200원圓임이 발령원부에 기록되어 있다.  1951년 8월 31일자로 개편된 학제에 따라 오늘날 진주남중학교로 개칭되어 있는 진주농림 하급학년인 진주농림중학교로 전근된다. 그러다가 1952년 4월 30일에는 마산동중학교 교사로 전근되어 진주를 떠나게 된다. 이상이 진주농림고등학교(현재의 진주산업대학교)에 남아 있는 발령원부의 기록이다. 지금까지 마산동중학교로 전근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마산동중학교 교사 발령원부에 의하면 1952년 4월 30일에 부임한 그는 그해 5월 24일 의원면직으로 교사직을 스스로 버린다. 이 시기는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어 53년 7월 28일 휴전협정이 조인된 6.25전쟁기이기도 하여 그의 고향 진주는 유엔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정부는  임시수도 부산으로 피난 와 있던 혼란기였다. 이 와중에 그는 마산으로 전근하게 되는데 앞으로 충실하게 교사직을 수행한다면 공립학교  교육 종사자로 큰 인물이 될 기회를 스스로 버린다.
진주농림고등학교 시절 진주를 떠나지 않으려는 과정의 그의 기행에 가까운 헤프닝과 축산과 위생교사 시절 수업시간과 직원 조례와 종례시간의 그의 파격적인 행보는 해방공간의 진주 교육계와 문단의 신화적 일화로 여러 사람들에 회자되고 있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교육자로서는 부적격자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해방공간의 진주문단 나아가서는 예술계의 중심인물로 부상된다. 물론 그와는 대조적인 성격과 인격을 만년까지 지속한 巴城 설창수(1916-1998)시인과 항상 함께 하는 길이었지만, 1946년  그는 파성, 청마 유치환, 백상현 등과 함께 <진주시인협회>를 발족시켜 회지 《등불》을 47년 2월 창간하여 4집까지 내고 48년 4월 5집부터는 《嶺南文學》으로 확대 개칭되면서 <진주시인협회>는 <영남문학회>로 확대되고 6집까지 낸다. 다시, 《嶺南文學》은 《嶺文》으로 개칭되고 6.25전쟁이 나던 1950년을 제외하고는 한 해도 결간되지 않고 1960년까지 모두 18집을 내었다. 요즈음이야 전국 방방곡곡에서 많은 문예지가 쏟아지고 있지만 50년대  그것도 6.25 전쟁기를 전후하여 지방에서 문예지를 비록 연간지이지만 발간한다는 것은 동기 시인과 파성 시인이 진주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嶺文》의 대표가 파성이고 주간이 동기 시인이었다. 1948년 7월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진주지부 부위원장을 맡고 49년 4월에는 부산에서 창간한 <자유민보> 논설위원이 되기도 하였다. 동기 시인의 문단 데뷔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47년 진주시협 기관지 《등불》에 <여인에게>를 발표하여 진주지역 시단에 데뷔하였고, 1948년 《京鄕新聞》에 <盞>을, 1949년 1월에 문예지 《白民》에 <流星>을 발표하여 서울 시단에도 데뷔하였다. 이렇게 본격적인 활동을 해방 이후에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40대 장년이었기에 경향각지의 문단에서 항상 형님으로 대접을 받았다. 이 작품들 가운데, <盞>은 비록 불발에 그쳤으나 《嶺文》 10호(1952.11) p.135에 시집 《盞》이 발간된다는 광고를 게재할 정도로 아끼던 작품이다.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진주지부는 1949년 전국 최초의 종합예술제인 嶺南藝術祭를 개최하게 되는데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대회장은 파성 시인이었으나, 문학부는 동기 시인이 책임자가 되어 이끌어 갔다. 1952년에는 파성 시인과 소설가 조진대와 함께 《三人集》을 내는데 그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순욱 박사에 의하여 자세히 연구된 바 있으며 필자 역시 《南江文學》 창간호에서 자세히 언급한 바 있다. 그 안에서 동기 시인은 《生命賦》제목의 소시집에 시 15 편을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한참 지난 시기이기는 하나 파성 시인이 5.16 군사정권 시절 활동이 제약을 받자 1962년에는 한국문협 진주지부장을 1963년에는 한국예총 지부장을 잠시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자는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해방기부터 그는 세르반데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주인공처럼 자유분방했으며 저돌적인 기질도 있었다. 그래서 그의 호가 東騎가 되었으며 이러한 기질은 아나키즘적 세계관에서 온 것이었으며 물론 그 기질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근 20년 동안 동경에 머물면서 체득한 부분도 있었다고 볼 수 있으나 거의 생득적인 허무주의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6.25 후의 부산과 창선 시절

1952년 5월 24일 마산동중학교 교사직을 그만 둔 이후의 동기 시인의 행적은 그의 회고기나 다른 글들에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그동안 시를 발표한 매체들이 부산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점에서 서울에서 피난 온 문인들과 어울려 임시수도 부산에 머물고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휴전협정이 조인된 지 3개월 남직 지났고, 마산동중을 사임한 지 1년 6개월 지난  1954년 11월 5일 그는 부산의 경남상업고등학교(현재의 부경고등학교) 전임강사 그것도 담당과목은 국어, 문예반 지도교사로 취직을 한다. 말하자면 정식 교사직을 떠난 그가 시인인 탓으로 문예담당 교사로 부임하여 그 해의 경남상고 교지 《九德》 3호 발간을 지도하며 그 곳에 시 <春心>도 발표한다. 그의 부산 생활은 6.25전쟁 직후의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단칸방에 부인 전길순 여사와 가난하게 살았다고 부산의 원로시인 박철석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부산생활도 곧 끝나고 1955년 8월 1일 필자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 필자의 고향인 남해군 창선면 창선중학교 교장으로 초빙된다.

필자는 동기 시인의 생애 가운데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고 정신적으로 여유를 가진 시절이 창선중학교 교장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창선중고등학교 인사기록 원부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듯이 1955년 8월 1일 재단 측에 의하여 초빙되어 왔다. 경남상고 인사발령부에는 1955년 10월 13일 의원면직으로 퇴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교사가 아닌 전임강사는 어떠한 신분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필자가 부산의 중등교원으로 있던 70년대 중반까지 학교장 발령으로 존재하였던 제도였다. 아마 창선중고교 부임 날짜보다 뒤에 의원면직으로 처리된 까닭은 공립에서 사립으로 옮겼기 때문에 부임 후 사직서를 보내어 처리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956년 3월 개교한 창선고등학교 초대 교장까지 겸임하면서 창선중고교 발전에 기여한 바가 많았다. 그는 창선중고교의 재단 분규와 시인으로서의 파격적인 행보로 일부 학부형이 문제 삼는 등 학교 사정이 복잡해지자 필자가 중학교 3학년 때인 1958년 9월 30일 사임한 후 고향 진주로 가시게 되는데 그동안 창선중학교와 개교 초기의 창선고등학교에는 진주에서 많은 교사들이 부임하였다.

1956년 필자는 창선중학교에 입학하여 드디어 시인의 제자가 된다. 이때부터 필자는 근 3년 동안 교장선생님이신 시인의 훈화를 들었는데, 그의 훈화는 유창한 편은 아니었으나 의례적인 훈화와는 다른 시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시인은 교장 직을 수행하면서도 한문 과목을 직접 가르쳤고 치과의전을 졸업하신 탓으로 생물 시간에는 간혹 보강을 하였다. 특히 수업 중에 인상이 남는 것은 낭랑한 목소리로 한문을 먼저 읽고 우리를 따라 읽도록 지도하시던  것과 생물 시간에 관절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그림을 그려가면서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서점과 신문사 지국을 경영하던 필자의 선친과 동기 시인은 의기투합하여 함께 술자리를 자주 하셨으며, 우리 집에 종종 초대되곤 하셨다. 어느 해 겨울에는 중고교 교사 몇 분과 함께 밤늦게까지 계시다가 귀가를 하려고 하니 손님들의 신발이 모두 없어져  신발가게에 가서 고무신을 사다드린 적도 있었다. 또 진주에서 창선중학교로 잠시 전학 온 시인의 생질 남학생이 필자의 바로 한 학년 아래 있었는데 서로 친하게 되어 필자는 사택에도 자주 놀러가 사모님으로부터 사랑도 많이 받았다. 필자가 중학교  1학년 2학기 어느 시점인가 확실한 기억은 없으나 동기 시인께서 교장인 인연으로 파성 설창수 시인을 초청하여 중고교생 전체를 교실 몇 개를 틔운 강당에 앉히고 문학 강연회를 가졌다. 파성의 열정적이고 해박한 강연에 전교생이 매료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파성 시인의 소개는 그 당시 고등학교 교무주임이던 서병일 선생께서 하였다. 필자는 맨 앞자리에 앉아 메모를 해가며 열심히 강연을 듣고 막연하나마 시인의 꿈을 키웠다. 그로부터 2년여 뒤에 동기 시인께서 창선을 떠나게 되자 필자의 선친을 비롯한 비교적 문화의식이 있던 면내 유지들은 계속 교장 직을 수행하게 만류하기도 하였다.

동기 시인과 필자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동기 시인께서 창선을 떠난 지 몇 개월 후 필자는 진주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게 된다. 그때에 입학시험을 치기 위하여 머문 곳이 진주시 상봉서동 1005번지의 3호 길가 방이었다. 이때의 에피소드는 오래전 진주의 문예지에 청탁을 받고 회고한 바 있었지만 아래 채  길가 방에 자게 되었는데 길 쪽으로 난 창호지 문에다 모처럼 입학시험을 치기 위하여 사 입었던 교복 바지저고리를 걸어두고 잠이 들었던 것이다. 뒷날이 합격자 발표 날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뒷날 이른 아침에 일어나 보니 도둑이 창호지 문을 칼로 오려내고 교복을 몽땅 가져간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시골에서 모처럼 진주라는 도시에 간 나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나중에 한방에서 2년 넘게 하숙하게 되는 진주중학교 3학년이고 진주농림고등학교에 시험을 쳐 합격한 동기 시인의 7촌 조카 이명래 군이 나와 한 방에서 잤는데 잠옷 바람이지만 우선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가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합격자 발표장에 가서 합격의 기쁨을 누렸다. 그리고는 앞에서 잠시 언급한 진주중학 2학년생인 동기 시인의  생질 옷을 작았지만 빌려 입고 시외버스 차부로 가서 고향에서 올라오신 아버님을 만나 중앙시장으로 가서 부랴부랴 교복을 사 입었던 기억이 새롭다. 진주고등학교 입학한 후 필자의 아버님은 필자를 다른 곳에 하숙시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당연히 동기 시인 댁에 부탁하는 것이었다. 필자 역시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사랑채 길가 쪽이 아닌 안쪽 방에서 1959년 3월부터 2학년 말인 1961년 2월 말까지 이명래 군과 하숙을 하였다.  그 당시 동기 시인은 경남일보 논설위원으로 집필하고 계셨지만 그것이 생활에 큰 보탬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고정수입이라고는 필자와 이명래 군의 하숙비와 길가 쪽의 사랑채에 함석 가공하는 점포와 그에  딸린 셋방과 전길순 사모님의 노력 등으로 살림을 꾸러간 것으로 기억된다. 필자는 동기 시인의 신문 논설이나 기타 산문 그리고 문예지의 시 원고의 최종 교정에 자주 불려가서 도와 드리기도 하였다. 그 당시 동기 시인 댁에는 진주의 문인들과 예술인 그리고 문인지망생들의 출입이 빈번하였다. 영남예술제(그 당시는 개천예술제로 개칭되기 전임)기간에는 동기 시인으로부터 종합 프로그램을 얻어 예술제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3학년 때에는 다른 집으로 하숙을 옮겼으며, 5.16쿠테타 직후 몸이 아파 1년간 휴학한다.

4. 1960년대 이후의 적빈의 삶

진주문인들의 회고에 의하면 동기 시인은 1962년 1월부터 6개월간 그 당시로서는 열악하기 짝이 없는 진주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잠시 맡았다고 한다. 그러나 깨알 같은 신원진술서 쓰기가 번거롭다고 그만 둔 뒤로는 작고하실 때까지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직장에는 전혀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필자는 1962년 3월 복학 이후에는 하숙집을 몇 군데 옮겼으나 상봉서동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간간이 동기 시인 댁을 방문하였다. 특히 62년 가을 진주고 교내 백일장에 입상하여 개천예술제 백일장에도 참여하게 되면서 교내 백일장 입상 작품을 손질하여 경남일보에 발표하여 주신 분도 동기 시인이셨다. 1963년 봄 진주고를 졸업하고 대구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진학하면서 방학 때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들리기도 하였다. 이 무렵 동기 시인은 상봉서동 집을 처분하고 봉곡동 374번지로 이사를 하셔서 그곳으로도 몇 번 방문하였다. 그때마다 습작시편을 보여드리면 경남일보에 경북사대생이라 소개하면서 발표를 주선하신 이도 동기 시인이었다. 1966년 7월 필자는 대학 은사이신 김춘수 시인에 의하여 3회 추천 완료하여 기성 시인이 되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어 귀향 길에 봉곡동 동기 시인 댁을 방문하였을 때에는 정말 크게 기뻐하셨다. 창선중고교 교장을 그만 두고 귀향한 1958년 10월부터 작고하신 1985년 5월까지의 동기 시인의 삶은 청빈을 넘어 적빈의 삶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는 후배 문인들과 예술인들에 의하여 거의 강요되다시피 잠시지만 진주문인협회장과 한국예총진주지부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격식과 굴레를 싫어하시는 성격으로 곧 벗어 던지셨다고 한다. 이 시절의 동기 시인에게는 시가 삶의 전부요 그의 세계관 표출의 유일한 통로라고 볼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그의 전집(시)에 수습된 작품 모두를 살펴보면 140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그 가운데 124편이 《현대문학》, 《자유문학》, 《월간문학》, 《경향신문》 등 서울의 중요 문예지와 일간 신문에 발표되었다. 이로 볼 때 어찌 그를 향토시인으로만 한정지울 수 있겠는가? 그는 1968년 평론가 조연현의 서문으로 제 1시집 《太陽이 미끄러진 氷板》(서울 문화당)을 발간하였다. 조연현은 서문에서 그 당시로는 드문 60대 현역시인으로, 마치 20대처럼 왕성하게 시작활동을 하고 있다고 격려한다. 그러나 서문 말미에 처녀시집이 마지막 시집이 될지 모른다고 염려한다. 이러한 염려는 결국 기우가 된다. 동기 시인은 이 시집을 내고도 70대 80대  현역 시인으로 왕성한 시작활동을 하였고 1976년에는 후배 시인들의 주선으로 진주지역 최초의 문예진흥기금 수예자가 되어 제 2시집《歷史》(서울, 학예사)를 발간한다.

그는 이러한 성과의 결과로 1964년 경남문화상을 받았으며, 1977년에는 부산의 눌원문화상, 1978년에는 제10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문학부문) 등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1982년에는 진주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수상 가운데 어느 하나 동기 시인이 먼저 뜻을 낸 것은 없다. 진주의 후배문인들이 나선 결과이며 경향각지의 심사위원들은 그 갸륵한 뜻과 동기 시인의 왕성한 활동에 경의를 표하며 수상자로 결정할 수밖에 다른 선택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상에서 받은 상금은 적빈한 시인의 가계에 큰 보탬이 되었다. 동기 시인의 태도나 후배문인들의 인정미 넘치는 주선은 오늘날의 문단 풍토에 경종을 던져주는 사건으로 길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진주의 개천예술제 기간만 되면 경향각지에서 몰려드는 문인들을 진주를 대표해서 맞아드리는 그에게 뜻하지 않는 사고가 났다. 1983년 그의 오랜 친구인 서예가 정명수 옹이 기거하는 비봉루를 오르다가 낙상하여 팔순 노구는 이 길로 투병생활을 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적빈의 표상이었던 동기 시인은 1985년 5월 4일 향년 80세로 이 세상을 하직한다. 그러나 그는 1980년대 전반에도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는 현역 시인으로 건재하였다. 

그 당시 진주예총회장이며 현재 경남문화예술회관 관장을 맡고 있는 최용호 시인과  1994년 8월에 작고하신 이명길 시조시인 등 많은 문인들이 솔선수범한 장례식 또한 두고두고 아름다운 미담으로 남아 있다. 동기 시인은 이명길 시인의 주선으로 그의 고향인 명석면 외율리 산기슭에서 영면하고 계신다.

5. 동기 시인의 가족과 후손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동기 시인의 가족과 후손에 대하여 언급하여 보기로 한다.
이 자료와 후손들의 근황은 앞에서 잠시 필자가 언급한 상봉서동 1005번지 3호 동기 시인 댁에서 2년여 동안 한 방에서 하숙한 이명래 군의 도움으로 알게 된 사실이다. 이 군은 2005년 동기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필자가 한국문학비평가협회에서 발간한 《문학비평》 제11집에 <동기 이경순 시인의 삶과 시 세계>를 발표할 때에 동기 집안의 제적부와  비록 좌절되었지만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동기 시인의 아나키스트 활동으로 인한 진주지검 구금 5개월과 대구복심법원 재판 등과 해방 이후의 문화 교육활동 등을 근거로 한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국가 유공자 청원 서류 복사본 등을 보내 왔다. 이를 바탕으로 필자는 보다 근거 있는 논문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벌써 그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제는 가족관계를 보다 자세히 밝혀도 살아 있는 후손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이 군과 연락하여 좀 더 자세히 밝히기로 한다.

제적부에 의하면 동기 시인의 선친인 이홍제 옹은 일제강점기이자 동기 시인이 본부인과 결혼한 이듬해인 1918년 10월 13일 사망하였다. 말하자면 동기 시인 14세 때에 돌아가셔서 동기 시인은 편모슬하에서 장성하게 된다. 한편 모친 백남성(1883-1959)은 76세인 1959년 1월11일 상봉서동 동기 시인 댁에서 별세한다. 말하자면 필자가 동기 시인 댁에서 하숙을 하기 시작한 1959년 3월 직전에 돌아가신 셈이다. 필자의 기억으로도 중간 채 높다란 방에 상청이 마련되어 있고 아침저녁으로 동기 시인이 예를 드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일제강점기의 대부분의 지식인이 그러했듯이 13세에 부모의 뜻에 따라 조혼한 동기 시인은 세 살 연상의 본부인 趙順振(1902-1962)여사와는 가치관이 달라 아들 한 사람만 낳고 일본 동경에서 돌아와 시인이 작고할 때까지 보살핀 부인 全吉順(1921-2003)여사와 삶을 꾸려가게 된다. 말하자면 필자가 중학시절이나 하숙생 시절의 사모님은 전길순 여사였다. 조순진 여사는 그의 아들과 함께 부산시 사상에 있다가 1962년 3월 8일  61세로 사망하게 되고 , 전길순 여사는 그 직후인 1962년 6월 7일 동기 시인과 혼인하는 형식으로  동기 시인의 호적에 입적하게 된다. 전길순 여사는 동기 시인이 돌아간 뒤에도 동기 시인의 시비 제막, 전집 발간 등을 지켜보았고 동기 시인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고자 노력하기도 하다가 2003년에 작고하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동기 시인과의 사이에 혈육은 없었다. 

시인의 외아들인 李向來(1928-1990)씨는 진주농림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한 후 공군경리장교로 임관하여 주로 김해 공군기지에 근무하였으며 소령으로 제대하였다. 아버지인 동기 시인과의 관계는 어머니 때문에 원만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필자의 기억으로 할머니의 소상 때와 그 외 몇 번 공군장교 차림으로 동기 시인 댁을 방문했던 것 같다. 그의 삶도 순탄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제적 등본에 의하면 첫 번째 부인 사이에 딸 셋과 아들 둘을 두었다. 그 가운데  둘째 아들이 부모와 미국 양부의 승낙으로 14세 때에 입양 형태의 이민을 가게 된다. 이 아들로 인하여 향래 씨는 부인과 함께 미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런 후 부인과 네 자녀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향래 씨만 한국에 남게 되자 1968년 4월 22일 첫 번째 부인과 협의 이혼을 하고 그해 9월 5일 두 번째 부인과 결혼하여 그 사이에 딸 하나를 둔다. 그는 1970년대 초반에는 진주성 복원사업에 참여한 건설회사의 현장 사무소장으로 근무한 바 있다. 그는 1990년 63세의 나이로 부산에서 암으로 사망하였다. 동기 시인이 80까지 사셨는데 비하여 단명하였다. 나머지 가족들 가운데 동기 시인의 첫 번째 며느리는 그가 낳은 자녀 즉 동기의 손자, 손녀들과 함께 아직까지 미국에서 75세의 나이인데도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두 손자는 미연방 경찰공무원과 자영업자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그리고 큰 손자 사위는 미국에서 오래전에 귀국하여 부산에서 정당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두 번째 며느리는 현재 64세로 부산 사하구에 딸과 함께 살고 있는데 그의 사위는 부산대 치과대학을 나와 사하구 장림동에서 치과병원을 개업하고 있다. 동기 시인이 치과전문을 나와 가지 않은 치과의사의 길을 생전에는 전혀 만나지 않은 막내 손자사위가 걷고 있으니 정말 인연의 끈질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국내에 거주하는 동기 시인의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모두 부산에 거주하고 있다는 점은 동기 시인 생전에 그의 영향을 받은 우리로서는 동기 시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어떤 일을 하여야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남은 가족들에게 동기 시인은 시아버지로 혹은 할아버지로의 역할은 전혀 하지 않은 무책임한 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시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훌륭한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제적부에  의하면 손자 손녀들 가운데 몇 사람은 동기 시인이 몸소 출생신고를 하여 호적에 입적시키고 있다. 혹시 그들에게 할아버지의 기억은 없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6. 아름다운 후일담

인정미 넘치는 진주문단에 동기 시인의 작고 후일담 역시 아름답다. 동기 시인이 서거하신지 4년이 지난 1989년 4월 9일 이덕 시인의 발의로 전개된 동기 시비 건립운동이 결실을 보아 동기 시인이 거닐던 남강 가에 세워졌다. 자연석에 그의 시 <저 언덕>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 별도의 돌에 비문이 새겨져 있다. 필자는 모금운동에는 참여했으나 제막식에는 피할 수 없는 다른 일로 가지 못했다. 참석한 사람들의 회고담에 의하면 미망인 전길순 여사와 며느님의 상봉과 화해도 이루어진 아름다운 모임이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두 번째 미담은 1992년 10월 30일 《진주신문》 창간 3주년 기념사업으로 박노정 시인
▲ 양왕용 시인
의 눈물어린 노력으로 《동기 이경순 전집》(시)이 간행된 일이다. 이 사업은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미완성 사업이다. 시만 수습되었지 경남일보와 다른 지면에 발표된 산문들과 동기 시인 연구물들이 별도로 수습되어야 완성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2005년 11월 1일 ꡐ시의날ꡑ에 진주문인협회 주최로 동기 시인 탄생 100주년 행사를 한 것이다. 행사의 주요 내용은 탄생 100주년 기념문집 《끝없는 광야, 깃발이 날린다》를 간행한 것과 학술 세미나, 전시행사 등이었다. 이렇게 진주문인들은 동기 시인을 기억하고 존경하고 있다. 앞으로 전집도 완성되고 해마다 동기 시인을 기리는 행사가 개최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1928년부터 1929년까지의 세칭 <진주 아나사건>으로 연루된 5개월의 옥고 사실과 일본에서의 아나키즘 활동 등이 재평가되어 애국지사의 반열에도 오르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필자는 앞에서 언급한 인연으로 그동안 두 번의.글과 한 번의 심포지엄에 주제 발표를 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전부 새로운 사실과 글들은 아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사실과 더불어 네 번째 글을 마무리 한다.

■ 양왕용
시인․부산대학교 명예교수

[《남강문학》제2호(2010년호) 수록]




[ 조회수 2,831 ] [추천수 3]
 
[남강문학] 제2호
양왕용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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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B경남 (dsb@hanmail.net)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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